기초수급생활자로 살아온 97년생 저자 안온은 '요즘' 가난이 어떤 모습인지 일인칭으로 써 내려갑니다. 거침없이, 그러나 신중하게 쓰인 『일인칭 가난』 출간 전 연재를 시작합니다. 11월 출간 예정이에요.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화 피아노
피아노는 희한하게 부의 상징이면서 가난의 상징이다. 부잣집에는 없으면 이상하고 가난한 집에는 있으면 이상한데, 후자의 경우 코딱지만 한 집에 코끼리만 한 피아노가 들어간다는 것과 기십만 원이 없어서 절절매며 사는데 기백만 원짜리 가재를 두드리며 산다는 것이 너무 아이러니해서 이상하다. 어쨌거나 이야깃거리가 되는 것은 가난한 집의 피아노다.
공공임대주택에 들어가 여생을 살길 바라는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 속 엄마는 하잘것없이 어느 아파트 모델하우스 경품 추첨에서 1등에 당첨돼 400만 원 상당의 피아노를 받는다. 제세공과금을 낼 돈이 없지만, 엄마는 언젠가는 피아노를 갖고 싶었다며 해맑게 좋아한다. 그리고 1년 뒤, 90만 원에 피아노를 판다. 월세를 낼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두가게를 해서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도도한 생활」°°의 엄마는 큰맘 먹고 둘째 딸을 위해 피아노를 산다. 세월이 지나 가세가 기울어 피아노를 팔자고 딸들이 성화해도(80만 원을 쳐준댔다) 엄마는 팔지 않고, 반지하에 사는 딸들에게로 보낸다. 딸들은 피아노를 이고 산다.
항시 팔릴 위기에 있는 가난한 집의 피아노가 우리 집에도 있었다. 크기로 보나 입성으로 보나 우리 집과 어울리지 않았던 피아노는 할아버지의 통 큰 선물이었다. 없는 살림을 쥐어짜 피아노학원에 보내놨더니 또래 중에서는 실력이 꽤 빨리 늘어 덜컥 콩쿠르 준비를 하게 된 것이 이유라면 이유,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들뜬 내가 기특하고 안쓰러웠는지 엄마가 할아버지에게 피아노를 부탁했다. 손녀를 제 아들에게서 구제해줄 수 없었던 할아버지는 대신 피아노를 구해주었다.
매일 정성스레 피아노를 닦아가며 연습한 아홉 살의 나는 전국 초등학생 콩쿠르대회에서 3위에 입상했다. 그 뒤로 피아노는 완벽한 내 보물이 되었다. 누구와도 나눠 쓰지 않아도 되어서 더 좋았다. 피아노학원을 그만두게 된 후에도 아빠가 술에 취해 거실에 널브러져 있지 않은 날에는 계란을 쥔 듯 둥글게 모양 잡은 손을 피아노 건반 위에 올리곤 했다.
어느 날 저녁 아빠가 외출한 틈을 타 피아노에 앉으려는데, 엄마가 급히 내 손을 낚아채더니 현관 밖으로 나섰다. 도착한 곳은 근처 지구대였다. 외상이 밀린 술집에서 또 술을 마시고 패악을 부린 아빠가 지구대 한구석의 의자에 눕다시피 앉아 있었다. 수치심을 모르는 불콰한 얼굴. 엄마가 내 손을 놓고 아빠를 부축했다. 아빠는 발을 끌었고 엄마는 몸을 휘청거렸다. 오직 나만 똑바로 걸었다. 수치심에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간밤의 해프닝을 뒤로하고 다음 날 학교에 갔다가 돌아와 보니, 피아노가 사라지고 없었다. 몸집 큰 가구가 있었다는 과거를 증명하듯 뭉실뭉실 먼지들만 날아다녔다. 그 좁은 집에서 피아노를 찾기 위해 돌아다니는 건 기괴한 짓이라 눈만 뻐끔거리며 망연히 집을 둘러보았다. 텔레비전이 없었다. 부엌 가스레인지 위에 늘 있던 곰솥도 없었다. 엄마가 가끔 팝송 테이프를 틀던 카세트도, 엄마의 화장대 구실을 하던 의자도 없었다.
어린이집 교사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고 있던 엄마가 집으로 돌아와 울고 있던 날 토닥이며 안아주었다. 엄마도 드문드문 우는 것 같았다. 소리 나는 물건이 증발한 집 안은 적막했다. 늦은 새벽, 집에 돌아온 아빠의 신발 벗는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알코올향이 역한 아빠의 신음은 어제도 그랬듯 우리를 울렸다. 다음 날, 엄마가 어찌어찌 텔레비전은 찾아왔으나, 의자와 카세트는 찾지 못했다. 최상급 중고였던 내 피아노는 진즉 팔렸다고 했다.
그로부터 15년이 흘러 전자피아노를 산 나는 왕년에 전국 3위를 거머쥐었던 경연곡을 연주하며 날 위로하는데, 가끔은 건반 위 손끝이 선득해진다. 내가 아홉 살에서 한 치도 자라지 못했을까 봐, 영원히 자라지 못할까 봐.
° 이주란,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 『제8회 문지문학상 수상 작품집』, 문학과지성사, 2018.
°° 김애란, 「도도한 생활」, 『침이 고인다』, 문학과지성사, 2007.
지은이 안온
가난하고 지난한 날에서 지나간 불온을 기록하는 사람. 나의 불온한 나날에 대한 기록이 당신의 생을 안온하게 덥히는 땔감이 되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