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일본 건축』은 어떤 '모습'일까, 디자인의 재료를 고르는 어려움과 함께 지난 3월 8일은 여성의 날이었습니다. 구글이 메인에 띄운 '최초의 여성들' 스토리를 읽으며, 넷플릭스의 여성의 날 기념 프로모션 영상을 보며, 그밖에 SNS 피드를 가득 채운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서도 올해엔 왜 유독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자리걸음, 아니 백 스텝은 아닐 거라 믿으며 이즈음 읽어볼 만한 책 10권을 소개합니다. 디자이너J의
『전후 일본 건축』 표지 디자인 여정과 마케터J의 난데없는 재즈 타임도 함께요. 3.8 여성의 날이니 38권의 책을 소개할 걸 그랬나 조금 후회하며 by 에디터 S ✦ 학교에 페미니즘을: 오늘 점심을 먹고는 수정액을 사러 망원동의 한 문구점에 들렀습니다. 초등학생 공책이 가지런히 놓인 매대에 “17줄짜리 남자” “17줄짜리 여자”라고 적혀 있었어요. 사장님께 『학교에 페미니즘을』을 한 권 선물해드려야겠구나 생각했습니다…. ✦ 날카롭게 살겠다: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이 글을 쓰려면 꼭 필요한 것이 방과 돈이라고 말했다는 건 너무나 유명하죠. 하지만 저는 조금 다르게 읽었어요. 울프는 사실 여성이 집 밖을 마음껏 나다니고 직업을 갖고 제 손으로 돈을 벌길 바랐던 것이라고요. 『날카롭게 살겠다』는 그 연장선상에 있는 책입니다. 단지 글 쓰는 여자들에 대한 책이기 때문이 아니라, 수많은 여성이 투쟁한 끝에 노동과 교육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재능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었던 여성들의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 성적 동의: 동의에 대한 철저한 반성 없이는 직장 내 성희롱도, 위력에 의한 성폭력도, 데이트 폭력도, 디지털 성착취도, 가정폭력과 아동학대도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모두의 성찰을 도울 입문서입니다. (온라인 서점 별점 테러를 당한 타이틀이라 제겐 아픈 손가락이에요. 아직도 보면 짠해요.) ✦ 재생산에 관하여: 이제 재생산 논의는 ‘자기 결정권’을 넘어 ‘정의’의 문제로 나아가는 중입니다. 이 책은 ‘재생산정의’의 장에 함께해야 할 주체들―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을 호명하는 한편, 재생산보조기술이 억압적인 정상가족의 틀을 깰 가능성이 될지, 오히려 혈연을 강화하는 도구로 작동할지를 점검합니다. 재생산권에 대한 고민의 결을 더하고 싶으신 독자 분들께 권합니다. ✦ 맨발로 도망치다: 가정폭력, 데이트폭력, 원치 않는 임신에 무방비로 노출된 10대 여성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책을 작업하며 저는 가끔 희미하게 웃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엔 일상이 있거든요. 작은 농담들도 있고요. 이 책은 폭력 피해자의 고통에 응하는 것과 그들이 고통스럽기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넌지시 알려줍니다. ✦ 윤석남: 1세대 페미니스트 예술가 윤석남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토론회 같은 곳이었는데, 미술비평가 분이 질문을 하시는 거예요. ‘당신을 여성주의 미술가라고 명명하는데 당신은 받아들이겠냐’고. 저는 ‘너무나 죽을 때까지 달갑게 받아들이겠다’고 대답을 했었지요.” 그의 예술 세계를 짧게나마 들여다볼 수 있는 책입니다. 그의 전시 「싸우는 여성들」이 학고재에서 4월 3월까지 열립니다. 동명의 책도 있어요. ✦ 아주 오래된 유죄: 한국의 법이 어떻게, 왜 젠더 정의 구현에 실패하는지 낱낱이 보여줍니다. 분노의 한숨과 억울함의 눈물이 번갈아 나오기 때문에 지하철에서 읽기는 어렵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 퀴어 이론 산책하기: “무엇이 퀴어 이론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퀴어 이론을 ‘퀴어’ 이론이게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해가는 책입니다. 방대하면서도 치밀한, 조금 어렵지만 친절한 퀴어 이론 입문서 되겠습니다. (읽는 중!) ✦ 거부당한 몸: ‘일시적 비장애인’의 삶에서 ‘장애인’의 삶을 살게 된 저자는 장애의 정의부터 ‘기형아’ 낙태의 문제까지 윤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촘촘히 다룹니다. 단어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으려 애썼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그 태도까지 번역해낸 번역자 분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전후 일본 건축』은 어떤 '모습'일까, 디자인의 재료를 고르는 어려움과 함께 by 디자이너 J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 수상자 최다 배출국 일본' '페허에서 세계 최대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일본 건축의 역할' '일본 건축에 대한 국내 저자의 책으로는 거의 유일한' 이 책에 대한 많은 서술은 디자인을 하기에 상당히 매력적이었어요. 처음 표지 디자인을 잡을 때 시도했던 사진은 아라타 이소자키의 포토몽타주, <다시 폐허가 된 히로시마>(사진 왼쪽 위)였습니다. 사진 자체에 강렬함이 있었고, ‘전후’ 일본의 상황과 고민을 함축하는 이미지이기에 이 사진을 써보기로 했어요. 막상 표지에 가져오니 ‘폐허’의 인상이 강해져 이 책의 시선이 일본 건축에 관한 비관으로 오해될까 걱정되었어요. 사진의 비율도 표지로 쓰기 어려웠어요. 가로로 긴 비율이라 확대해서 뒤 표지로까지 넘기면 앞 표지엔 페허의 이미지가 남겨져 지나치게 허망한 느낌이고, 앞표지에 다 들어오도록 줄이면 어떤 이미지인지 알기 힘들 정도로 작아지고요. 세로로 돌려봤죠. 그랬더니 도대체 어떤 사진인지 알아채기 힘들더라고요. ‘이건 안 되는 재료구나!’ 판단하고 얼른 다른 재료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후보를 찾는 건 그리 간단하지 않았어요. 책에 등장하는 각 건축물들은 뚜렷한 개성이 있지만 ‘전후 일본 건축’을 대표할 수 있는 걸 하나 딱 고르긴 어려웠거든요. 그래서 디자인 접근 방식을 바꿔봤습니다. 전면에 사진을 내놓고 상징처럼 보여주는 방식이 아닌, 시대와 분위기를 은근하게 드러내는 디자인을 해야겠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찾아낸 사진은 ‘태양의 탑’이 보이는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 전경 사진. 이 사진을 보는 순간, 그 시대로 돌아가 브라운관을 통해 ‘만국박람회’를 시청하는 듯한 이미지를 떠올렸고 바로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사진을 CMYK 4가지 색의 망점 이미지로 가공하여 브라운관 화면의 느낌을 연출했어요. 이렇게 연출한 이미지는 정점에 다다른 자본과 기술력을 과시하던 당시 일본에 대한 향수처럼 느껴지기도 했죠. ‘戰後 日本 建築’ 타이포 뒤의 건축물을 발견하는 재미도 느껴졌고요. 원본 이미지를 가공하면서 푸르고 붉은 색감이 빈티지하면서도 선명한 톤으로 올라오는 것도 좋았어요. 사진의 톤을 살려서 속표지는 파우더 블루, 면지는 코랄 색으로 결정했어요. 본문을 정갈하고 단정하게, 특별한 장식적 요소 없이 디자인한 터라 그 느낌을 표지에도 그대로 가져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제목과 저자, 부제를 같은 서체, 거의 같은 크기로 잡았어요. 한자의 서체는 두껍고 뾰족하게 깎이는 목판 활자를 떠오르게 하는데, 단게 겐조로 시작하는 책의 내용과 잘 맞는 느낌이라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어서 같은 사진을 다르게 가공한 다른 시안도 만들어봤어요. 만국박람회 사진을 세로로 길게 쪼개서 막대 그래프가 상승하는 느낌으로 이어 붙였습니다. 계단처럼 올라가며 어긋난 이미지로 일본의 고도성장을 연상시켜 강해 보이게, 그러면서도 부자연스럽고 불안한 느낌을 줬어요. 강렬한 사진이기에 나머지 요소들은 정직하게 뒀고요. 두 가지 시안 중 좀 더 일본 건축의 시각적 요소들이 속속 들어있는 첫 번째 시안이 끌렸고 저자의 문체와도 결이 맞다고 느꼈습니다. 마지막까지 ‘전후 일본 건축’의 한자 서체를 다른 서체로 바꾸어 1번 시안의 다른 버전도 잡아봤지만, 처음 서체보다 인상이 약해져 처음 서체로 정했습니다. 책에 상당히 많은 소스가 있었기에 그중에 더 좋은 것을 골라보려 평소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 본문을 훑었고, 디자이너로서 이 시간이 보람 있게 느껴졌어요. 재킷 종이도 최근 제지사 미팅에서 알게 된 수입지 ‘올드밀’을 사용했어요. 새로운 종이나 후가공, 서체 등을 쓰게 되면 작업이 더 설렙니다. 동시에 모든 요소를 고르는 과정이 굉장히 어렵기도 해요. 『전후 일본 건축』의 작업은 과정도 좋았고, 결과적으로 독특한 인상을 가진 책으로 나온 것 같아 만족스러워요.🙂 마티의 취향 마케터J, 여행을 못 가면 방구석 재즈 클럽 지난 주에 이어 마티의 취향 공유는 음악입니다. '재즈알못'에 가깝지만 언제 트랙이 바뀌었는지도 모르겠는 재즈 음반이나 채널을 틀어놓는 것을 좋아합니다. 좋은 재즈 클럽이 있는 도시로 여행 가면 꼭 한 번은 들렀었는데... 언제 또 가볼 수 있을까요? 지난 주말에는 '여기가 도화 재즈 클럽이지!'(도화동에 삽니다) 하며 이틀 내내 재즈를 틀어뒀고, 그게 또 생각을 먼 곳에 데려다줘서 좋았습니다. 블루노트 수집가의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는 친구가 보내준 커티스 풀러의 Quantrale로 시작해, 소니 롤린스, 델로니어스 몽크, 버드 파웰... 그러다 맨날천날 듣는 쳇 베이커랑 엘라 피츠제럴드로 마무리한 나른한 밤이었습니다. 도서출판 마티 |
편집진이 띄우는 책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