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혼자 재미있는 실험을 해봤습니다. 마티 기출간 도서가 (전부는 아니지만) 제법 꽂힌 책장 앞에 서서 왼끝맞춤 조판이 된 책을 골라내봤어요. 기억력이 나쁜 편은 아니지만 현재 유통되는 130여 종의 본문 조판 형태를 모두 기억하진 못하니 헷갈릴 것이라 짐작했죠. 그러나, 저는 왼끝맞춤 책만 쏙쏙 골라냈습니다!
🌱죽순 천재만재 설을 주장하고 싶지만, 나름 그럴싸한 기준이 있었어요. 디자이너 그리고/또는 책의 성격. “이 디자이너는 왼끝맞춤 선수지!” 하는 판단은 없었지만, 단행본 조판의 유구한 규범인 양끝맞춤을 흔들었을 법한 디자이너의 작업을 골랐습니다. 거기에 ‘이 책은 왼끝맞춤 괜찮겠네’라고 생각하며 꺼낸 결과는 아래와 같습니다.
『날카롭게 살겠다』 : 타자기를 사용했을 시기의 여성 작가들에 관한 이야기 / 조정은 디자이너
『마이너 필링스』 : 시인이 쓴 에세이, 변동폭이 크고 강렬한 차별 감정에 대한 글 / 김동신 디자이너
『미래주의 요리책』 : 이보다 독특한 선언, 문학, 시나리오는 없음 / 오새날 디자이너
『젊고 아픈 여자들』 : 『마이너 필링스』와 같은 앳 시리즈, 구어에 가까운 글쓰기 / 김동신 디자이너
『재생산에 관하여』 : 심포지움 발표와 토론의 현장감 / 오새날 디자이너
『체르노빌 다크 투어리즘』 : 폐허가 된 체르노빌 탐방기, 일본 무크지 번역 / 신덕호 디자이너
『학교에 페미니즘을』 : 초등학교 교사들이 쓴 업무일지의 이면 / 오새날 디자이너
『함락된 도시의 여자』 : 전쟁 중 지하 방공호나 다락에서 손으로 쓴 일기 / 오새날 디자이너
『확률가족』 : 아파트 키드 2030세대의 회고적인 글 / 홍은주.김형재 디자이너
솔직히 본문 시안이 왼끝맞춤으로 나오면, 편집자는 여러 가지를 세심히 따집니다. 책의 크기, 글줄의 길이, 한 면에 들어가는 글줄의 수, 전체 분량, 문장의 톤과 성격, 밀도, 독자가 취할 독서 방식(기본적으로 발췌독이냐 통독이냐), 학술서 여부 등. 양끝맞춤일 때도 마찬가지로 따져야 하는 요소들인데, 왼끝맞춤일 때 더 신경 쓰는 건 사실이에요. 왼끝맞춤이 불편하다고 호소하는 독자들이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디자이너와 출판사가 독자의 편의를 무시한 채 자기 취향을 내세우려고 왼끝맞춤을 선택하는 건 아닙니다. 왼끝맞춤을 하면 ❶ 낱말 사이의 간격이 일정하고, ❷ 글줄 끝 낱말이 온전한 덩어리를 유지하며, ❸ ‘자유’ 조판으로 불렸던 형식인 만큼 판면의 운동성, 리듬감을 전달한다는 디자인적 장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왼끝맞춤이 양끝맞춤에 비해 판독성과 가독성을 현저히 저해한다는 일관된 연구 결과는 없습니다. 다만, 단의 폭이 짧을 때 왼끝맞춤의 실효성이 더 크고, 행장이 길고 페이지가 연속될수록 그 매력이 크지 않다는 주장이 있어요. 왼끝맞춤과 양끝맞춤은 타이포그래피와 편집 디자인 역사에서 오래된 논쟁거리입니다.
인쇄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 독자가 출판사에 항의 전화를 할 만큼 왼끝맞춤은 여전히 낯섭니다. 그런데도 왼끝맞춤 조판을 디자이너와 출판사가 선택할 때에는 ‘책과 어울린다’라는 대전제가 있습니다. ‘어울린다’라는 판단 또한 주관적이므로 설왕설래가 있겠지만, 그래도 ‘그냥’ 하는 건 아니에요. 지금까지 마티는 에세이, 일기나 구어에 가까운 문장, 현장감 등을 왼끝맞춤의 리듬에 실어왔던 것 같아요. 왼끝맞춤의 역사(?)를 본다면 저항, 자유, 반문화 등의 주제어와도 어울릴 듯한데,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이 왼끝맞춤이면 좋았을까? 생각하면⋯
잘 모르겠어요. 좀 더 공부와 경험이 필요한 부분 같아요.
우리가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는 능력, 즉 문해력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운문, 산문, 논문 등 다양한 형식과 단어를 익혀야 하듯 ‘시각적 문해력’을 위해서도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배경 지식 없이 어떤 형태의 좋고 나쁨을 직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믿음은 잠시 접어두고, 왼끝맞춤에 대해 디자이너들이 쓴 글을 함께 읽어보면 어떨까요?
•이 글을 쓰고 왼쪽맞춤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 글
우유니 디자이너, 「미움받는 왼끝맞춤에 대한 변호」.
김동신 그래픽 디자이너, 「취향의 방향을 가늠하기」, 『출판문화』 2021년 2월 호.
로빈 킨로스, 『왼끝 맞춘 글: 타이포그래피를 보는 관점』, 최성민 옮김, 워크룸프레스, 2018.
얀 미덴도르프, 『텍스트와 타이포그래피』, 김지현 옮김, 안그라픽스, 2015.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면
헤라르트 윙어르 지음, 『당신이 읽는 동안: 글꼴, 글꼴 디자인, 타이포그래피』, 최문경 옮김, 워크룸프레스, 2013.
로빈 킨로스, 『현대 타이포그래피: 비판적 역사 에세이』, 최성민 옮김, 작업실유령, 2013.
요스트 호훌리, 『마이크로 타이포그래피』, 김형진 옮김, 워크룸프레스, 2015.
더글러스 토머스, 『푸투라는 쓰지 마세요』, 정은주 옮김, 마티, 2018.
얀 치홀트, 『책의 형태와 타이포그래피에 관하여』, 안진수 옮김, 안그라픽스,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