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케묵은 말 같지만 사랑은 정치다
🦻팔랑
사랑은 무엇일까? 말씀일까, 생명일까, 구원일까, 행복일까, 또는, 혹시,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닐까. (혼잣말이었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생각지 않던 어린 시절에 사랑은 더 익숙했습니다. 많은 설화에서, 동화에서, 드라마에서, 전체관람가 영화에서 사랑은 언제나 이루어지면 곧 끝이 났으므로(“결혼한 둘은 영원히 행복했어요~”) 질문이나 궁금증을 유발할 뒷장이 없었지요. 그러나 어른이 되어 실제로 경험해본 사랑은 한순간도 쉴 틈이 없고 끝도 없더란 말이죠. 영원은 고사하고 우여곡절, 파란만장, 질풍노도가 없는 사랑을 어디 사랑이라고 할 수나 있겠습니까. 그러다 마흔을 훌쩍 넘어서자 주변을 돌아다니는 사랑 이야기는 이제 삼단논법도 아니고 스무고개도 아닌 희한한 단답으로 막을 내립니다. “두 사람 어떻게 됐대?”
“결혼했대.”
“아아- 애도 있대?”
그런데 마티의 신간 『사랑에 따라온 의혹들』은 사랑이 이루어지자 극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무엇이? 사.랑. 말입니다. 그 사.랑.이요. 빠져들었고, 결혼했고,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아이의 사랑스러움과 신비함에 빠져 현실의 고달픔을 하루하루 미뤄두고 있었지요, 많은 가족이 그러하듯. 아뇨아뇨, 이런 이야기는 책에 나오지 않습니다. 편집자의 추측입니다.
책은, ‘재난’에서부터 시작입니다. 사랑은 무변이어야 한다고도 하고, 변하는 것이 맞다고도 하는데, 사랑 앞에 재난이 들이닥치면 사랑은 무엇이 될까요?
『사랑에 따라온 의혹들』은 사랑에 관한 얘기입니다. 동시에 정치에 관한 얘기입니다. 곧 사랑은 정치가 아닌가, 묻는 책입니다. 밀당이 로맨스가 되고, 로맨스가 사랑이 되고, 사랑이 가족이 되면, 밀당은 가위바위보 게임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사랑의 무게가 더해질수록 수평을 이루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한쪽으로 치우친 사랑은 대개 상대에게 곱절 이상의 고독을 떠안깁니다. 가족의 기울어진 사랑은 그래서, 그리도 오래 생채기와 외로움을 남깁니다.
『사랑에 따라온 의혹들』은 어느 날 터진 지진처럼, 예고 없이 불어닥친 쓰나미처럼 한 가정을 붕괴시킬 정도의 크나큰 재난으로 시작합니다. 짧은 아빠의 일기로 시작하는 이 이야기는, 모성 신화, 여성의 경제 활동, 돌봄 노동, 의료 문제, 선택적 복지 제도의 허점과 그리고 ‘이 모든 자질구레하고 구질한 현실 속에서 사랑이 어떤 모습’인지 탐구합니다. 다루는 모든 주제가 사회적이며 공론화된 이슈이나, 이 이슈들이 지극히 좁은 범위, 한 개인과 한 가정으로 들어오면 얼마나 미묘하고 복잡한지, 또 제도적으로 어떻게 논의되어야 할 사안인지를 곱씹고 또 곱씹게 됩니다.
원고를 먼저 일독하신 정희진 선생님의 추천사를 미리 보여드려요.
자녀가 아플 때 부모의 역할과 삶에 대해, 돌봄 노동과 경제적 부양의 성별 분업에 대해, 이만한 자기 기술이 있을까.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매트릭스에서 질병과 돌봄을 둘러싼 구체성의 미학이 여기 있다. 미시적 서사와 사회 구조를 치밀하게 교직한, 열정과 지성이 넘치는 불꽃 같은 책이다.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 나는 왜 이렇게 쓸 수 없을까.
책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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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3일(금) 남편의 일기
윤이는 5.28(토) 저녁에 처음으로 열이 났다. 괜찮아졌다가 5.29 저녁에도 열이 났고, 5.30, 5.31, 6.1까지 5일 연속 저녁에 열이 났다. 열이 날 때 왼쪽무릎 뒤쪽이 아프다고 했는데, 월요일에는 제대로 걷지 못할 정도여서 학교를 쉬었다. 그리고 소아과에 갔는데, 성장통인 것 같으니 좀 더 지켜보자며 해열제를 받아왔다.
코피는 6.1에 났고, 6.2에도 났다. 그리고 6.3 금요일이 되었다. 세수하러 화장실에 들어간 윤이가 코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지혈을 했으나 잘 듣지 않았다. 8시 10분이나 15분쯤 되었을 때, 코에서 손가락 굵기만 한 덩어리가 나왔다. 나는 놀라서 병원으로 향했다. 코피는 계속 났다. 8시 반경에 뉴고려병원에 도착했는데, 응급실에서 우리 병원에는 이비인후과가 없으니 일산백병원이나 동국대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백병원에 도착한 시간이 9시 10분경. 도착 직전에 코피가 멎었다. 약 한 시간 정도 코피가 난 셈이다. 코피 환자는 피검사를 먼저 하고 두 시간 후에 검사 결과를 가지고 진료를 본다고 했다.
11시가 좀 넘었을까. 이비인후과 전공의가 예진을 하는데, 무슨 수치 하나가 안 좋다며 이건 자기네 과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교수를 만났는데, 교수가 입원해서 봐야 될 것 같고 소아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즉시 소아과 교수에게 전화를 걸더니 소아과로 가라고 했다. 소아과로 갔다. 소아과 교수가 나를 따로 불렀다. 그러더니 백혈구 수치가 14만으로 엄청나게 높으니 이건 악성질환을 의심해야 한다고 했다. 악성질환이 뭐냐고 내가 물으니 교수가 예를 들어 백혈병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큰 병원 어디 갈 데가 있냐고 물었다. 나는 지인 중에 의사가 없고 큰 병원에 아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랬더니 자기 병원에서는 해결이 안 된다며 그럼 자기가 알아보겠다고 했다. 즉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윤이를 간단히 보고, 다시 나만 따로 부르더니 “OOO 교수가 받아주기로 했다”면서 소견서를 써줄 테니 지금 즉시 국립암센터 응급실로 가서 OOO 교수와 통화했다고 말하라고 했다. 살이 떨리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수납을 하고 소견서를 받아들고 윤이를 태우고 암센터로 향했다. 아이 엄마에게 연락을 하고 암센터 응급실에 들어갔다. 전공의가 오더니 이것저것 문진을 상세히 했다. 내가 뭐가 의심되냐고 묻자 백혈병이라고 했다. 살 수 있냐고 했더니 통계적으로 80퍼센트가 산다고 했다.
이날 하루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코로나로 상주 보호자 한 명밖에 있을 수 없다고 해서, 아이 엄마에게 인계를 하고 나왔다. 병원 로비에 앉아 있는데 울음이 나왔다. 혼자서 엉엉 울다가 부끄러워서 울면서 차로 갔다. 차 안에서 다시 엉엉 울면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에 아버지인지 어머니인지 누나인지 기억나지 않는데, 누군가 내게 전화를 걸어서 정신을 차리라고 했다. 정신줄을 놓지 말라고 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화장실 세면대에는 코피의 흔적이 여전했고, 차에서 윤이 코를 틀어막았던 수건 두 개는 피에 젖어 있었다. 화장실 청소를 하고 샤워를 하고 밥을 먹는 중에, 전화가 왔다. 윤이 수혈할 피가 필요하단다. 내일까지 네 명이 헌혈을 해야 한단다. 먹던 밥을 다 버리고, 정신없이 사방에 연락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필요한 짐을 싸서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피는 한 팩을 구했다. 아이 엄마가 윤이 곁을 지키고, 나는 밤이 되어 집으로 와서 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