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 잘 보내셨나요? 🌝 지난 뉴스레터에서 휴재 예고를 했었는데요. 휴재인 듯, 휴재 아닌 듯, 휴재 특집을 준비해보았습니다. 어떻게 시작됐는지 모르겠어요. 누군가 만화책 이야기를 꺼냈고, 사무실 한쪽 벽에 걸려 있는 화이트보드에 각자가 좋아했던 만화책 제목을 적다 보니 금세 화이트보드가 꽉 차더라고요. 그중 한 권씩만 골라봤습니다. 그때는 어물쩍 넘어갔지만, 지금은 가뿐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기엔 마음이 편치 않은 책들이 있어요. 언젠가 한 구독자님이 제안했지만, 시도해볼 엄두를 내지 못한 Footnoters' Pick 주제 '길티 플레저'가 이런 것일까요?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주세요. 2주 후에 만나요! ❝ 길티 플레저, 만화 ❞ 🌱 죽순 저에게 우미노 치카(외래어표기법을 따르면 지카)는 ‘자아 찾기’ 여정(가끔은 삽질)을 섬세하고 예민하게 그리는 작가입니다. 『허니와 클로버』라는 작품에서는 미술 대학 학생들의 설익은 자아가 여기저기 부딪히는 모습을 특유의 따뜻한 화풍으로 그려냈죠. 『3월의 라이온』은 “March comes in like a lion and goes out like a lamb”이라는 영국 속담의 한 구절을 딴 제목이라고 합니다. 3월은 사자처럼 험상궂게 왔다가 양처럼 온화하게 간다는 뜻인데, 만화 내용도 그렇습니다. 어릴 때 부모를 여읜 주인공 키리야마 레이는 아버지와 양아버지의 족적을 따라 일본 프로 장기 기사로 자랍니다. 고등학교를 입학하면서 양부모 집에서 ‘탈출’해 독립하는데요, 우연히 만난 이웃과 또 다른 ‘가족’을 만들어가며 자기 자리를 찾죠. 사랑받아본 기억이 희미해진 그에게 아무런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사랑이 성큼 다가옵니다. 그의 주위로 한 걸음씩 다가오는 사람들의 보폭이 꽤 큽니다. 서로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도리 없이 읽는 사람의 마음도 뜨끈해지죠. 오미노 치카의 작품은 ‘작화 붕괴’가 없고, 스토리가 산으로 가는 법도 없습니다. 똑, 똑, 똑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 한숨, 기쁨, 환호…의 감정이 계속 파동을 일으켜 만화책을 덮을 즈음엔 꽤나 감정이 복잡해집니다. 잠잠해질 때까지 심호흡을 해야 하죠. 묵직한 감동이 분명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더 이상 『3월의 라이온』을 읽지 않습니다. 승단 시합을 벌이며 성장해가는 주인공을 응원하는 마음은 변함없고, 주변의 ‘어른들’이 겪는 진통들 또한 여전히 마음을 울립니다. 하지만 또 다른 주인공, 그러니까 레이에게 보금자리를 내어준 ‘아카리’라는 여성 캐릭터를 편안하게 볼 수 없어요. 아카리는 부모가 이혼하고 어머니가 지병으로 작고한 후 할아버지 손에서 크며 동생 둘을 키웁니다. 유기묘를 데려다 통통하게 살 찌우고, 레이에게 밥을 지어주고 반찬을 들려 보내고 품에 안아주며 끊임없이 보살피는 역할을 자처합니다. (그 한계 없는 돌봄의 역에 저는 그만 질려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일본 특유의 접대 산업인 ‘카바레’에서 일합니다. 고모인지 이모인지 친척 어른이 운영하는 카바레에서 나이 지긋한 남성들의 말동무가 되어주고 술을 대접합니다. 마티에서 출간한 『맨발로 도망치다』가 이 위에 겹칩니다. 자기 한 몸을 지키기 위해, 원치 않은 임신으로 낳은 아기를 먹여살리기 위해 카바레로 출근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죠. 웃음과 농담, 돌봄과 배려만으로 삶이 살아진다면, 『맨발로 도망치다』는 아마 책 제목부터 달라졌을 겁니다. 그렇게 살아지기만 한다면 아무도 도망치지 않았을 테니까요. 저는 결국 수백 권의 만화책을 내다버렸습니다. 일본 만화가 성찰 없이 재생산하는 장면들, 캐릭터에 매력을 못 느끼게 됐어요. 몇 종 소장 중이지만, 펼쳐보지 않은 지 수년은 된 것 같아요. 뉴스레터에 실을 사진을 찍으려고 『3월의 라이온』 11권을 재구매했지만(우미노 치카의 작풍을 가장 잘 보여주는 표지인 듯해서 골랐어요) 다시 당근마켓에 내놓을 거예요. 휴재 특집을 준비하면서 만화책을 지독히 사랑했던 시절이 떠올랐어요. 애정이 마구마구 되살아나서 재난지원금을 만화책에 탕진할 뻔도 했고요. 그 애정을 물리쳐야 해서 조금, 아주 조금 허전하긴 하네요. 🔇 모베 WRC나 F1 등이 무한 튜닝으로 열을 올리던 1980년대 중반, 세계 20대 기업 가운데 16개가 일본 기업일 정도로 일본 경제가 절정에 달하던 때, 토요다, 닛산, 혼다, 미츠비시, 스바루 등이 만들어낸, 지금은 멸종한 종류의 자동차들. 이 자동차들을 개조하는 거대한 애프터마켓, 공도에서 벌어진 레이싱, 청소년 학대라고 해야 할 가업을 잇거나 돕기 위한 10대 노동, 원조교제 등, 『이니셜D』는 어디서도 재현 불가능한 1980-90년대 일본 특산품. 🦈 조스바 저는 확신합니다. "당신은 어디선가 재규어씨의 짤을 봤을 것이다." 『삐리리~불어봐.ᐟ 재규어』는 제목부터 정말 '요상'합니다. 재규어 씨는 성인이나 되어서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일러스트에 나오는 코스프레 수준의 착장을 하고 등장합니다. 뮤지션을 꿈꾸는 키요히코는 오디션장에서 그를 만나는데.. 재규어는 끊임없는 딴지개그로 그를 묘하게 본인의 인생으로 끌어들여요. 항상 진지하고 장황하게 말하지만 죄다 딴지개그입니다. 마이너한 악기 피리와 마이너한 개그로 무장한 재규어를 읽으면 혼자 키득키득 웃게 되는데, 읽다가도 뭔가 시간을 낭비하나 싶기도 한 만화입니다. 마이너한 개그치고 그의 짤은 오래도록 떠돌아다니네요. 재규어가 쓰레기 취급하는, 생각보다 잘생긴 편인 '해머'라는 캐릭터를 제일 좋아해yo! 🧼 퐁퐁 이 방대한 대하 장편만화의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지구에 재앙이 닥치고 우리가 아는 문명 사회가 사라진 미래의 일본. 한 사막 마을(많은 지역이 물에 잠기거나 사막화되었다는 설정)에 쌍둥이 남매 타타라와 사라사가 태어납니다. 아들 타타라는 장차 왕을 쓰러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 운명의 아이인데요, 어느 날 왕의 아들이 운명의 아이를 죽이고자 마을을 습격해 타타라의 목을 벱니다. 마을 사람들이 절망하고 있을 때, 사라사는 남장을 하고, 타타라인 척, ‘운명의 아이’로 살아가기로 결심해요. 사람들을 이끌고 작은 마을을 떠나 함께 싸울 동료를 찾고, 말을 타고, 검술을 배우고, 싸우고, 다치고, 누군가를 죽이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를 잃으면서 모험을 합니다. 사실 예언자가 점지한 운명의 아이는 사라사였어요. 『바사라』는 ‘소녀’의 성장서사이자 개인적 복수로 시작해 왕권을 무너뜨리는 혁명서사, 원수와 사랑에 빠지는 로맨스판타지, 휴머니즘, 모든 것을 다 갖춘 만화인 거죠. 어렸을 때 만화 대여점에서 빌려봤고, 종종 생각나면 만화방에서 치즈 올린 짜파게티 먹으면서 봤고, 몇 년 전 갑자기 읽고 싶어져서 지금은 없어진 한양툰크에서 애장판 몇 권을 샀는데요. 1991년에 1권이 나온 만화책을 다시 보니 서사의 헐거움이나 유치한 면이 자꾸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처음 만난 여자의 가슴을 만지거나 몸매를 평가하는 남자 캐릭터의 행동을 짓궂은 장난처럼 표현하는 장면들을 보고 있자면 답답해지고요. 기껏 산 애장판을 보다 말고 책장 깊숙한 곳에 꽂아 놨었는데요. 휴재 특집 준비하다가 추억이 방울방울.. 맺힌 나머지 북새통으로 달려가 나머지를 사서 완독하고 말았습니다. 툴툴거리면서 읽었지만 어쩐지 마음이 웅장해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어요. 책 좋아하는 친구가 떠올랐다면? |
편집진이 띄우는 책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