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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 쓰기 = ‘여자’(m’other)
큰 동그라미. 작은 점. 곡선의 출렁임. 투박하고 무겁게.
다시, 점. 작은 스마일. 큰 스마일. 반듯하게. 리본. 둥근 글자. 점. 네모. 까맣게. 작은 동그라미. 점. 새카맣게. 해바라기. 점. 별. 굵고 선명하게.
해바라기와 별. 가운데를 잇는 선. 짧은 선. 촘촘히.
접힌 귀퉁이.
그 위에 다시, 점.
쉼표를 찍듯이.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를 읽는 동안 내 몸은 멀고 아득하다. 어디에 있는 누구인지, 스스로에 관해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마다 생성되는 “시간 밖의 시간”(68)을 속수무책으로 헤매는 탓이다. 적막한 병실에 멍하니 앉아 있던 내 늙은 몸은 19세기의 어느 좁고 눅눅한 방에 갇혔다가, 여성 군중의 외침으로 가득 찬 광장을 향해 씩씩하게 걸어간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와 태초의 기억을 빠르게 넘나들면서. 정확한 시간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 무엇도 쉽게 분별되지 않는다.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들이 받아쓰는 문장은 계속해서 내게 낯선 무언가를 데려다놓는다. 아니다. 어쩌면 내가 되돌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되돌아가는 것일지도. 기억과 기억이 되지 못한 곳으로. 책의 여백을 무너뜨리고 무너진 자리를 채우는 무언가를 향해 나는 계속 몸을 틀어 돌아가는 중이다.
처음에는 고통스럽게, 나중에는 환희와 은닉 속에서 번역의 시차와 틀린 받아쓰기로 저항하며(209).
그러나 무엇에 대한 저항인가? 망각에 대한 저항. 납득할 수 있는 기억과 완결된 서사를 향한 저항이다. 이 책의 주요 키워드인 ‘마지네일리아’(marginalia)는 ‘여백(margin)에 있는 것들’에서 파생된 말이자, “책의 여백에 남기는 표식, 주석, 메모, 삽화, 분류할 수 없는 반응의 흔적들을 총칭”(9)하는 단어다. 아찔할 만큼 긴 역사를 지닌 여자들의 땅과 같은 단어. 저자 김지승이 전유하여 그의 고유한 방법론으로 삼은 ‘마지네일리아’는 내 몸이 만난 적 있으나 잊어버리기로 한 온갖 존재들을 지면 위로 불러온다. 나와 ‘마지네일리아’의 문장 사이에 너무 많은 것들이 비집고 들어서 있다. 목소리, 길거나 짧은 비명, 속삭임, 웃음, 뭉개지고 퍼지는 웅얼거림이 책의 여백에 가득하다.
우글거리는 타인의 기억 더미를 한참 헤집다 보면, “마치 단 한 번도 흐른 적 없었던 것처럼 꿈틀꿈틀 힘겹게 요란한 소리를 내며 허물어지는” 나만의 “시간과 물, 몸이라는 경계들”이 나를 알아보고(45), 나에게 손짓하며, 나를 빤히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물 안에 물이 있는 것처럼 말 안에 말이 산다(110).
노랗거나 하얀 색깔의 메모지들. 식탁 위에, 전화기 옆에, 거실 책장의 벌어진 틈에, 대충 꽂혀 있거나 반쯤 구겨져 나뒹굴던 메모지의 잔상이 빨간 책의 여백 위로 겹치며 어른거린다. 사각의 형태였던 메모지의 네 귀퉁이에는 각종 도형과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 조각, 점과 끊어진 선, 휘날린 그림들이 바짝 붙어 늘어서 있다. 귀퉁이야말로 저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땅이라는 듯.
넘실대는 기호의 움직임 너머로 메모의 주인인 한 여자의 얼굴이 보인다. 노란 전화기를 들었다 내려놓고, 믹스 커피를 마시거나 창밖을 내다보던 여자는 자세를 바꿔 색 바랜 벽의 한가운데를, 그 너머의 기억을 골똘히 노려본다. 이제 그녀는 등을 말고, 몸을 외로 기울이며 손목을 아주 부드럽게 움직인다. 그의 손끝에서 하얀 모나미 펜이 천천히, 느리고 긴 춤을 춘다.
엄마(mother)는 생애 첫 타자(m’other)(157)
시간이 의미를 되찾아온다. 뚜벅뚜벅. 엄마는 얼굴이 없다. 여기 없다. 그런데 언제나 있다(83).
진정한 저자
뚜벅뚜벅.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는 얼굴이 없지만, 언제나 여기 있는 수많은 여자들의 시간을 되찾는 책이다. 작가는 엘렌 식수, 마르그리트 뒤라스, 다와다 요코,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찬쉐, 앨리 스미스, 토니 모리슨, 테레사 학경 차, 메리 셸리, 캐시 박 홍, 버지니아 울프, 쓰시마 유코 등 그야말로 ‘여자 쓰기’의 끝없는 행렬을 여성적 읽기로 통과하며 그 여백을 쓴다.
눈부신 이름들. 황홀하고 슬픈 여성(성)들. 제대로 발견되지 않은 별자리. 혹은 학습되고 체화된 아름다움의 덫. 하지만 그게 정확히 무엇이란 말인가? ‘여성적 읽기’란 ‘여성적 글쓰기’와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임시적이고, 위험하며, 잠정적이면서도 충동적인 개념인 ‘여자’를 통과하여 가능해지는 행위로서, 그 자체 “전쟁을 도발하는 말들”이 아니던가? 밀도 높은 여백의 여백을 들여다보기에 앞서 우리는 익숙한 의심을 늘어놓는다.
비늘, 비듬, 때, 우유, 엄마, 화상 자국, 재, 죽음… 쥘리아 크리스테바가 개념화한 ‘비체’(abject)를 떠올리지 않기가 어려울 만큼 무수한 비체와 비체화(abjection)가 선명한 『목욕탕』의 초기 판본은 지금과 퍽 달랐다. 1990년대 독일어판의 경우 재생한 것 같은 종이에 인쇄된 희미한 사진 위에 본문 텍스트가 놓였다. 여성의 몸 사진이었다. 서른 명의 여성 사진이 두 번씩 쓰이며 총 60페이지로 구성된 책의 매 페이지마다 사진 속 여성의 몸을 텍스트가 반투명하게 덮고 있다. 양피지에 기록된 것을 긁어내거나 씻어낸 후 그 위에 덮어쓰기 한 사본, 팰림프세스트(palimpsest)처럼(43).
김지승은 ‘여성적 글쓰기’와 ‘여성적 읽기’를 개념적으로 입증하거나 갱신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책 속에서 책으로 되돌아가며 “기억과 시간의 허술한 결탁”(183) 사이를 적극적으로 서성인다. ‘여성적 읽기와 쓰기’를 오래도록 말하고 그것을 직접 살아낸 작가에게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몸소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야릇하게 배반해나가는 것이다. 이는 작가 특유의 고집스러운 읽기이자 읽은 것을 긁어내기이며, 동시에 다시 받아쓰기이다. 마치 다와다 요코의 ‘비늘’이 “사진 속 여성의 몸”을 벗겨내고 그 자리를 다시 반투명하게 덮는 것처럼. 김지승은 자신의 맨 몸에 덧씌워진 얼굴 없는 여자들의 언어로, 그들 언어에 반향하는 자신만의 메아리로 “가기/오기, 가기, 오기의 방식”(197)을 반복한다.
그래서일까. 지난 한 달간 김지승의 문장에 깊이 사로잡혀 있었던 나는 서평을 쓰는 지금까지도 책의 장르, 혹은 범주에 대해 확언하지 못한다. 이 책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에세이인가, 시인가, 아니면 비평인가. 혹시 이 책은 작가가 『딕테』를 묘사하며 쓴 대로 “장르의 특권을 예민하게 감지한 경계의 아트-북”(186)인 것일까. 하지만 비평이 호명과 분류를 전제로 작동한다는 내 소심한 편견을 버리지 못한 채로도 나는 빨간 책의 의미와 비의미 사이에서, 언어와 비언어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무언가를 홀린 듯 받아쓰고 있다. 작가의 말처럼 문학적 관습의 해체가 무엇보다 “바람의 이름을 바꿔 그 바람의 방향을 바꾸는 종류의 유희”(197)라면, 바뀐 바람의 방향에 우선 몸을 맡겨봐야 할 테니 말이다.
“내가 이 편지를 쓰려고 밝혀놓은 램프 주위로 수많은 나방이 미친 듯 맴돌고 있어.” 불빛을 중심으로 모이는 인물들과 죽음의 날갯짓이 파도처럼 펄럭하는 소설을 구상하기 시작했다고 쓴 버지니아의 일기를 먼저 읽어서였는지 나는 『파도』 속 나방과 파도가 죽음의 다른 이름이라고 여겼다. 그가 인용한 문장은 나도 줄을 그은 것이었는데 그의 편지로 다시 읽자 죽음이 내게 와서 철썩 부딪치고 부서졌다(59-60).
김지승식으로 바람의 방향을 바꾸기. 그것은 이를테면 위와 같은 장면으로 펼쳐진다. 작가는 자신이 언젠가 그것에 줄을 그었던 과거의 방식으로 『파도』의 문장을 만나지 않는다. ‘나’가 만난 적 있는 울프의 문장은 “그가 인용한 문장”에서 다시 시작된다. ‘그’는 『파도』의 이질적 시간성을 경유한 인물처럼, 죽었으나 분명하게 살아 있는 ‘나’의 친구이다. 친구의 지난 편지를 통해 솟아올랐으며, 울프의 일기 속 불안까지 성실하게 거쳐 ‘나’에게로 되돌아온 『파도』의 문장을 김지승은 “철썩 부딪치고 부서”지는 죽음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에서 변주되는 이 독특한 긁어내기-덮어쓰기는 기묘한 여성적 헌사를 바탕으로 한 여성 작가들의 평전인 동시에 김지승 개인의 자서전, 혹은 내밀한 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저자는 작품들에 대한 형식적인 오마주는 물론, ‘뒤라스 효과’와 같은 텍스트-저자 결속의 효과 전체를 자신의 텍스트로 옮겨 재배치하는 능란함까지 가감 없이 보여준다. 이는 단지 화려한 기교가 아니라 ‘가장자리’의 잠재성을 부풀리면서도 억제하고, 제한하면서도 열어젖히는 미학적·이론적 실천이다.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에서 시도된 쓰기는 주로 여러 예술 장르 경계의 “임계적 공간”에서 발생하는 수행으로서, 그간 남성-권력의 것으로 쉽게 이해되어온 대문자 ‘이론’의 정치성을 탈취하고 이를 전적으로 재구성하는 ‘자기이론’의 한 방법론처럼 보이기도 한다. 동시에 기존의 여성적 형식과 영향력의 의미를 철저하게 해부하고 모방하며 자기만의 고유한 범주를 만드는 글쓰기로 생각해볼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그렇다면 김지승 책의 진정한 저자는 누구일까? 아니, 그것은 궁극적으로 누구일 수 있는가? 책의 장르나 범주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처럼 보인다. 아픈 몸에서 비롯된 지극히 내적인 속삭임부터 은밀한 사랑의 전언까지 숨김 없이 늘어놓는 많은 ‘나’들은 1인칭이자 4인칭, 3인칭 그/녀 혹은 텍스트 그 자체로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를 바치다
이들 모두가 나 자신은 알아차리지도 못했던 내 내면의 어떤 영역에 먼저 도달했던 이들, 즉 내가 ‘나’로 터져 나올 때까지 나에 대해 예언해 준 예언자들이다. 이 ‘나’는 당신들 모두이다. 나는 그저 나만으로 존재하는 걸 견딜 수 없으므로, 나는 살기 위해 타인들을 필요로 하므로, 나는 바보이므로, 나는 완전히 비뚤어진 자이므로, […] 나는 말없이, 공허에 대해 명상한다. 내 삶에 딴죽을 거는 건 글쓰기이다.
엘렌 식수는 『별의 시간』의 저자에 대해 그/녀는 “( ) 사이에서 보류된 저자”라고 말한다. 진리로서의 저자는 유보될 수밖에 없는데, 진리 자체가 언제나 유보되기 때문에 “진정한 저자가 된다는 것은 유보 속에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보 속에 있기. 김지승의 ‘나’는 괄호 사이에서 보류된 저자로서 쓰는 자신을 기입하고, 기입된 자신을 기꺼이 박탈당하며 “부재로 느끼는 좌절의 감각”(101)을 이어 쓰기 위해 ‘나’를 바친다. ‘누구’에게? 열세 개의 제목 후보, 열세 개의 이름, 열 세 개의 ‘OU’(혹은), 열 세 개의 “비명”에게. 「저자 헌사」는 울프와 ‘그’로부터 내게 부서지며 부딪쳐온 ‘죽음’을 향해 열린다.
죽음이 여성일 수 있는가. 그렇다. 여성은 죽음인가. 이 질문의 답은 조금 길어져야 한다(212).
즉각 대답을 내놓을 수 있는 질문과, 대답을 길게 유보해야 하는 질문 사이에서 우선 죽음을 시작하는 여자들이 있다. 바닥을 향해 오르는 ‘사다리’를 타는 여자들. “왼쪽 ‘I’라는 한 단어와 오른쪽 ‘I’라는 다른 언어가 ‘-’로 연결되려면 죽음이 필요”(188)하기 때문이다. 위태로운 사다리를 흔들리며 오르는 이들. 아래로, 아래로. 김지승의 ‘여성적 읽기’는 우리를 그 사다리 앞으로 데려다 놓는다. 아래로, 더 아래로.
다시, 모든 이야기는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227)
글쓴이 최가은
문학평론가. 한국문학 연구자. 2020년부터 비평 활동을 시작했으며, 문학사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90년대’와 ‘여성문학특집’: 『문학동네』 1995년 여성문학특집을 중심으로」 「90년대 여성문학의 곤란한 ‘대중성’: 공지영 담론을 중심으로」 등의 논문을 발표했고, 『시, 인터-리뷰』 『페미니즘 리부트 시대, 다시, 고정희』 등을 공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