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동인도회사』를 소개한 각주* 118호를 보신 번역가 노시내 선생님께서 자신도 그 책을 읽고 있다며 소식을 전해주셨어요. 쌀쌀한 가을의 바람을 타고 온 노시내 선생님의 책 편지를 여러분과 나눕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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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런던에서 온 편지
🫧 노시내
안녕하세요. 번역자 노시내입니다.
『작가 피정』이 나올 무렵에는 파키스탄에 살고 있었지만, 그사이 3년 반 동안 이어진 파키스탄 생활을 접고 영국 런던으로 옮긴 지도 벌써 열 달이 지났습니다. 새로운 곳에 오니 손에도 새로운 책이 들립니다. 애정하는 작가 도리스 레싱의 단편 소설집 『런던 스케치』(서숙 옮김, 민음사)를 제일 먼저 탐독하고, 세계 최대 규모의 식물원인 큐 식물원에 다녀온 뒤 버지니아 울프의 단편 「큐 식물원」(이미애 옮김, 민음사)을 읽었습니다. 이어서 얼마 전에는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영국 산책』(김지현 옮김, 21세기북스)과 보리스 존슨의 『런던 위인전』(이경준, 오윤성 옮김, 마티)을 완독했습니다.
앞의 두 작품은 가슴에 잔잔한 울림을 남기며 런던의 분위기를 짚어볼 수 있게 해주고, 뒤의 두 책은 빙긋빙긋 웃어가며 영국과 영국인에 대한 정보를 얻어갈 수 있습니다. 다만, 워낙 유쾌하고 익살맞은 작가 빌 브라이슨이 주는 웃음은 좀 거친 욕설을 하는 순간에도 어두운 구석이 없는데, 보리스 존슨의 유머는 사람을 은근히 기분 나쁘게 하는 영국적인 조소에 가깝습니다. 게다가 호시탐탐 음담패설까지 흘린다는 말이죠.
두 저자의 글에서 묻어나는 영국 사랑도 결이 다릅니다. 영국인과 결혼해 영국에 정착해 살아가는 미국인 빌 브라이슨의 꽤 균형 잡힌 외부자 시점과는 달리, 보리스 존슨의 글은 자국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합니다. 그럼에도 해박한 역사 지식과 잘 구성된 문장으로 독자를 매료시키는 재주를 보며, 마티에서 “뻔뻔하지만 납득되는”이라고 붙인 소제목이 그야말로 납득되더군요. 사실 ‘정치인 보리스 존슨’에 대한 평가와 호불호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저자 보리스 존슨‘의 필력은 저널리스트 출신답게 훌륭합니다. 존슨이 연설이나 토론에서 의외로 눌변이어서 더욱 신선한 재발견이었습니다.
두 저자의 말처럼 영국이 그리 좋은 나라인가 하는 물음에 답하기는 이 나라에 산 기간이 너무 짧지만, 제가 영국에 대해 갖고 있던 선입견 하나는 그동안 상당 부분 사라졌습니다. 다름 아닌 영국인이 무뚝뚝하고 차갑다는 선입관입니다. 오히려 남에게 (조심스럽게) 상관하고, 모르는 사람에게 소소한 잡담을 하려고 거리낌 없이 말도 잘 거는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를테면 슈퍼에서 땅콩버터를 고르는데 옆에서 함께 고르던 한 여성이 제게 말을 겁니다. “이게 보존제나 야자유도 안 들어 있고 좋아요.” 자기 손에 들린 병을 보여줍니다. 그러다가 그 제품 판매원으로 오해받을까 봐 염려됐는지 금방 덧붙입니다. “괜히 부담 갖진 마세요. 그냥 제가 좋아하는 거라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우리는 뭐가 덜 달고, 뭐가 더 짭짤하고 해가며 그 자리에서 잠시 수다를 떱니다. 빵 진열대 앞에서도 누가 말을 붙입니다. “제가요, 원래는 베이킹을 좋아하고 은퇴해서 시간도 많고 해서 빵을 많이 굽는데요, 오늘은 젊은이 여러 명이 집에 저녁 먹으러 와서 아무래도 사야 할 것 같아요.” “아 그러세요. 그럼 아무래도 넉넉히 사놓는 것이 낫죠.” 제 응답에 그 여성은 활짝 웃더니 큼직한 사워도우 식빵 한 줄을 집어 들고 저보고 좋은 하루 보내라며 인사합니다.
제가 본 런던 시민들은 길 가다가 서로 몸이 닿거나, 가게에서 좁은 지점을 지나갈 때 서로 비켜주거나 하면서 사소한 것에 미안하다, 실례한다, 고맙다는 말을 늘 입에 달고 살고, 길에 개똥이나 토사물같이 지저분한 것이 있으면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피해 가라고 알려주기도 하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상황을 살펴서 짐을 들어주거나 좌석을 양보하는 등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재빨리 도움을 주더군요.
런던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들도, 미리 줄도 안 서고 서로 관심 없는 듯해도 누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지 서로 다 보고 있어서 버스에 올라탈 때 먼저 와서 기다린 사람이 먼저 승차하도록 배려합니다. 런던 버스 운전사들은 어쩌다 승차하는 승객의 교통카드가 말을 안 들으면 그냥 타라고 손짓합니다. 노숙인이 무료로 승차하게 놔두는 모습도 봤습니다. 승객이 부탁하면 정거장 아닌 곳에서 내려주기도 합니다. 가령 스위스라면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습니다. 모르는 사람끼리 말을 거는 일도 드물고요.
『작가 피정』과 『스위스 방명록』을 읽으신 분들이 종종 스위스 소식을 묻습니다. 스위스는 요즘 관세와 이민 제한이 화두입니다. 지난 8월 미국과의 관세 협상이 결렬되어 트럼프 행정부가 스위스산 제품에 39퍼센트라는 고율 관세를 부과했고, 그 여파로 대미 수출이 급감했기 때문입니다. 그사이 영리한 스와치 회사 CEO 닉 하이에크 주니어가 시계 숫자판의 3과 9의 위치를 뒤바꿔 39퍼센트 고율 관세를 풍자한 한정판 시계를 직접 디자인하고 출시해 큰 인기를 모았습니다. 스위스 정부가 관세 협상을 다시 시도한다고 하니 지켜봐야겠지만, 그때까지 이 스와치 한정판 시계는 불티나게 팔릴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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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자주 거론되는 또 하나의 이슈는 내년에 국민투표에 부쳐질 이른바 ‘1,000만 인구 거부’ 발의안입니다. 극우 스위스국민당(SVP)이 제안한 이 발의안은 현재 900만을 넘기고 계속 증가 추세인 스위스 인구를 앞으로 1,000만 이하로 제한하자는 것인데, 2050년까지 인구가 1,000만이 넘어가지 않도록 정부가 미리 영주권, 시민권 발급, 난민 인정 등을 중지하고 이미 정착한 이민자들의 가족이 스위스에 합류하는 것도 제한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반이민, 반난민, 반외국인 정책을 “인구가 많아지면 스위스 환경이 파괴된다” “지속 가능한 인구 증가” 등의 친환경 구호로 포장해 중도와 좌파의 표를 얻어내려고 얄미운 꼼수까지 쓰지만, 그래 봐야 눈 가리고 아웅이지요. 그럼에도 발의안에 대한 여론조사가 얼추 반반으로 나와서 반대 측과 이 발의안에 역시 반대하는 정부가 바짝 긴장하고 있습니다. 늘 만원인 대중교통 수단, 교통체증, 주택 부족 등에 사람들의 불만이 많고 최근 몇 년간 우크라이나 난민 유입 등으로 인구가 빠르게 증가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미 고령화로 노동인구 감소를 겪는 스위스가 젊은 이민자들을 받지 않으면 어쩌겠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1,000만이라는 자의적인 숫자가 왜 정당한지도 잘 모르겠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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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스위스국민당 홈페이지 svp.c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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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여전히 제 관심사입니다. 그래도 역시나 이 순간 저의 주된 관찰 대상은 지금 살고 있는 영국입니다. 적절한 책을 찾아 읽는 것도 새 장소를 알아가는 작업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요즘은 영국의 식민 역사를 좀 더 알아보려고 몇 주 전 마티의 각주에서도 소개된 윌리엄 달림플의 『동인도회사』(최파일 옮김, 생각의힘)를 읽고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윈스턴 처칠에 관한 책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보리스 존슨의 『런던 위인전』에 담긴 처칠 챕터가 제 호기심을 바짝 자극했거든요. 워낙 역사적인 인물인 만큼 평전도 다양해서 어느 것을 읽어야 할지 고민 중입니다.
그러나 책이 아무리 현지 이해에 훌륭한 도우미 역할을 한다고 해도, 현지에서 더 열심히 해야 하는 일은 틈나는 대로 나가서 보고, 듣고, 맛보고, 사람 만나 이야기 나누면서 오감, 육감을 총동원해 다양한 각도로 현실을 경험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집을 나섭니다. 건널목에 도달합니다. 먼저 꼭 “오른쪽을 쳐다보고” (영국은 좌측통행이니까요) 달려오는 차가 없는지 확인하고 건너라고 바닥에 하얗게 써놓은 손글씨가 살갑습니다. 낙엽으로 뒤덮인 거리를 하염없이 걷다가 문득 따스한 깨달음이 찾아옵니다.
“어느 날 저녁, 걸어서 공원을 가로지르는데, 불빛이 건물, 나무, 진홍색 버스들을 하나로 엮어 친숙하고 아름다운 어떤 것을 만들어냈고, 나는 여기가 내 집이 됐다는 걸 알았다.”
— 도리스 레싱, 1957년 런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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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 편집부는 개막작 <코리올리 효과>를 함께 보았어요. 쌀쌀한 저녁 공기를 뚫고 가서 컴컴한 영화관에 들어앉으니 스르륵 잠이 올 것 같았는데, 영화가 저희를 붙들었습니다.
자연-비인간동물-인간의 얽힘을 파고드는 서울동물영화제가 벌써 8회를 맞이했습니다. 상영프로그램 두루 살펴보시고 마음에 들어온 영화 한 편 콕 집어보세요! 기후 재난/재앙의 시대를 맞아 인간으로서 질문하고 행동해야 할 지점들을 함께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
2025 서울동물영화제
비로소 세계 The World That Therefore We Become
민주주의의 참혹한 위기 이후 우리는 공동체의 가치와 정의를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사회 곳곳의 목소리를 드러내며, 재난을 기억하고, 연대의 가치를 되새길 수 있다면, 우리는 위기를 새로운 가능성으로 바꾸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소리에, 재난 속에, 연대 안에 동물이 있습니까. 팬데믹의 공포와 기후위기의 현실을 체감하는 지금, 우리의 위기의식은 인간-동물 관계에 대한 성찰과 전환으로 이어지고 있을까요?
동물권 운동과 사회적 인식은 분명히 확장되고 있지만, 동물 착취의 범위는 줄어들지 않는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동물복지 계란을 사는 것이 쉬워진 만큼 육류 소비 역시 더 저렴하고 간편해졌습니다. 반려동물 문화는 확산되었지만, 그 변화가 동물을 대하는 제도적, 법적, 정치적 기반에 도전하진 않습니다. 환경과 재난에 대한 공포는 커지지만, 여전히 동물권은 정책의 중심에 서지 못합니다.
동물권은 단지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후위기, 공공보건, 생태계 파괴, 반민주적 기업의 횡포, 약자와 노동의 권리 등 수많은 문제와 동물권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동물권은 우리 모두의 위기의 해결책과 연관된 공통의제이며, 따라서 동물은 이 모든 문제와 관여된 주권자여야 합니다.
동물 없이 새로운 세계가 가능할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인간만의 세계가 아니라, 다종(multispecies) 공동체입니다. 새로운 가치들과 희망으로 상상하는 세계에서 동물은 단지 보호나 애호의 대상이 아니라, 공동 구성자이며, 참여자이며, 행위자로서 반드시 포함되어야 합니다.
제8회 서울동물영화제는 말합니다. 동물이 인간의 결정과 행위에 영향을 주고,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참여하는 세계ㅡ 그러할 때 비로소 세계입니다.
* 영문 슬로건인 "The World That Therefore We Become"는 데카르트의 "I think, therefore I am(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인간중심성을 비판하며 데리다가 주창한 "The Animal That Therefore I Am(나는 동물이다, 고로 존재한다)"를 전유해 더욱 확장시킨 표현입니다.
출처: 서울동물영화제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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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 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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