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파주 북소리 기획팀에서 "책이 없는 세상'라는 주제로 원고를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습니다. 책이 왜 없어지지? 책이 없다는 건 글도 없다는 건가? 웹진도 책으로 생각해야 할까? 아포칼립스? 문명 이전? 문어(文魚 아니고 文語)는 사라지고 구어만 남은 세상? 갈팡질팡하다가 한 가지 생각이 삐융-⚡️ 지나갔습니다. 오다 에이치로가 『원피스』 15권인가 16권인가 17권에서 의사 히루루크의 입을 빌려 말했죠.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사람들에게서 잊혔을 때다...!!!"
책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책이 없는 세계란 책이 잊힌 세계. 그러나 한 명이라도 책이란 것을 기억한다면요? 유치하지만, 그런 낭만을 품고 쓴 원고의 일부를 여러분과 나눕니다.
『책이 없는 세상 Bookless World: Nonfiction』엔 책 없이 못 사는 여러 분야의 필자가 참여했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 서점과 도서관을 찾아주세요!
+ SF 소설가들이 참여한 『책이 없는 세상 Bookless World: Fiction』(김초엽 외 6인)도 있어요. 이 책은 서점엔 없고 출판도시문화재단 스마트스토어에서만 구매할 수 있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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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억한다, 책을
서성진 마티 편집자(aka 🌱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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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억한다, ‘컴퓨터 세대’의 판타지 소설 『드래곤 라자』가 신문 전면에 실렸던 것을. 황금가지의 광고 문구였겠으나 ‘청소년 필독서’라는 여섯 글자로 엄마를 꾀어 전질을 획득할 수 있었다. 인터넷을 연결하면 유선전화를 사용할 수 없어 PC통신 사용이 제한된 탓에 컴퓨터 세대의 감각으로 읽진 못했다. 자신을 의심할수록 분열해 불완전한 자기 영혼이 증식하는 ‘영원의 숲’ 에피소드를 제일 좋아한다.
나는 기억한다, 빌라 옥상 장독대 뒤에 만화 잡지 『아이큐 점프』를 차곡차곡 숨겨두었다가 엄마에게 들켜 폐지로 넘겨졌다며 울며불며했던 친구를. 나는 만화 잡지를 보는 친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잡지 연재 분량은 만화 하나당 몇 페이지 안 돼 감질맛만 났기 때문이다. 단행본이 되기까지 1년을 기다리느냐, 개미 오줌만큼 흘려주는 몇 페이지씩을 참으며 1년을 보내느냐, 1990년대에 만화를 본다는 건 극강의 인내심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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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억한다, 『람세스』를 읽고 고고학자가 되겠다며 고대 문명에 대한 책을 사달라고 아빠를 졸랐던 것을. 크라운 판형에 컬러 인쇄, 2만 원 후반대 가격의 책을 고른 내게 아빠가 말했다. “아빠나 되니까 사주는 거야.” 버리는 돈이었던 걸 직감하신 듯했다. 실제로 그랬다. 나는 그 책을 30쪽도 채 읽지 않았던 것 같고, 이후 고고학과 진학을 염두에 둔 적도 없다. 책을 충동구매하는 버릇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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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억한다, 대학교 후문 근처에 있는 서점에서 신중하게 책세상문고를 고르던 것을. 살림총서, 구 문지 스펙트럼, 시공사 디스커버리가 가벼운 대학생의 지갑과 지적 허영을 작게나마 만족시켜주었다. 책을 사면 10퍼센트 할인 쿠폰을 줬기 때문에 그 서점을 끊을 수 없었다. 그곳에서 산 사회과학서가 많은데, 그중 확실히 기억나는 건 비봉출판사에서 나온 김수행 선생이 번역한 『자본론』이다. 잉여가치, 교환가치보다 ‘아마포 저고리’가 참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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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억한다, 한유주 소설가로부터 『녹천에는 똥이 많다』를 빌림 당해 읽었던 것을. 비속어 ‘썅’의 표준어가 ‘쌍’이라는 것을 이 책에서 알았다. 입말로 쓰여 욕설까지 그대로 번역한 『마일스 데이비스, 자서전』(근간)을 편집하면서 ‘썅’을 ‘쌍’으로 일괄 수정했더니, 말맛이 사라졌다. ‘썅’과 ‘쌍’을 두고 고민하는 순간엔 편집이란 대체 뭘 하는 직업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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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억한다, 책 없는 세계를 주제로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하다는 푸념에 동료가 했던 말을. “지금! 지금 이곳 여기 우리.”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안다. 독서율이 해마다 떨어지고 있다.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은 업계가 감당할 문제지만, 일상에서 책이 이토록 멀어지는 것은 단군 이래 최대 불행이다. 단언하건대, 숏폼으로는 이 글에 쓰인 약 6000글자만큼의 기억조차 만들 수 없다.
마지막으로 나는 기억할 것이다, 이 글을 조 브레이너드의 『나는 기억한다』의 형식을 빌려 썼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기억한다』는 『계속 쓰기: 나의 단어로』를 편집하며 알게 됐다는 것을. 나 같은 인간이 있는데 책이 없어질쏘냐.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