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을 '잘 읽었다' 혹은 '제대로 읽었다'는 느낌의 종착역은 어디일까요? 저자 스스로 자신의 인생 한가운데로 파고들어가 부조리와 모순, 성찰을 연쇄적으로 폭발시키는 『마이너 필링스』 같은 책을 읽고 나면, 밑바닥에 잠들어 있던 에너지가 수천 갈래의 새로운 질문과 고민으로 퍼올려집니다. 저자의 문장이 되살아나고 숱한 상황과 기억과 경험이 섞이고 재탄생해 금세 책과 하나로 묶이지요. 느낌이 감동이 되고 감동이 쏜살같이 해석되자 그 책에 관해 말하기 위해 내 경험이 오롯이 겹쳐집니다. 오늘 소개하는 김지승 선생님의 『마이너 필링스』 서평은, 바로 그 지점을 깊고 날카롭게, 아프고 민망하게 짚어냅니다. 이 귀한 원고를 여러분께 보여드릴 수 있어 매우 좋습니다. 잘 읽는다는 것,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것, 나아가 함께한다는 뜻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바흐 칸타타 듣는 법 🔇 모베 “바흐는 꽤 옛날 사람이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교회 칸타타』 (이하 『바흐 교회 칸타타』) 를 만들면서 새삼 깨달은 사실입니다. 1685년에 태어난 바흐는 튀링겐, 또는 작센 사람이었습니다. 이 간극은 바흐의 음악을 연주하고 녹음하는 과정에 고스란히 묻어 있습니다. 우선 바흐가 사용한 바로크 시대의 악기는 요즘과 상당히 달라, 어떤 악기를 선택하는지가 연주의 큰 방향을 미리 결정하게 됩니다. 최근에는 바흐가 사용했던 악기를 최대한 충실히 반영하는 편입니다. 오보에 다 카차, 코넷 등 『바흐 교회 칸타타』에 낯선 악기 이름이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작곡과 초연 년도, 작사가 등의 정보도 불확실한 경우가 많습니다. 바흐 연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어서 최근 연구 성과에 따라 조금씩 산발적으로 업데이트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바흐 교회 칸타타』는 가장 믿을 만한 정본으로 꼽히는 뒤르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디 칸타텐』(Johann Sebastian Bach: Die Kantaten)과 라이프치히 바흐 아카이브 등을 참조했습니다. 하나님과 하느님 등, 성경 번역 선택은 언제나 어렵습니다. 바흐의 칸타타는 루터 교회의 산물이기에, 한국 루터 교회가 채택한 개정개역 성경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바흐는 성경 구절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칸타타는 무엇보다 노래였으니 바흐는 음악에 맞게 성경 구절을 수정해 가사로 사용했습니다. 한편, 이런 연유로 바흐의 칸타타들이 지나치게 종교적이지 않을까, 그래서 바흐는 좋아하지만 칸타타는 꺼리는 분들도 계실 듯합니다. 바흐 칸타타에 대한 당대 최고 거장 중 한 명인 가디너는 바흐의 작품을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으로 날카롭게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신의 영광과 영혼에게 허용된 기쁨을 위하여” 1738년 바흐가 세운 음악의 목표입니다. 바흐에게 종교적 색채와 대중적이고 세속적인 효과는 별개가 아니었습니다. 300여 년의 시간, 종교개혁의 여파로 복잡하게 뒤엉킨 신성로마제국의 정치와 종교적 배경을 훌쩍 건너뛰고, 우리가 바흐의 음악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합니다. 음악, 나아가 예술을 즐기기 위해서 이런 정보를 모르는 편이 나을 때도 있습니다. 알려고 하지 말고 느끼라고 말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더 잘 느낄 수 있기도 합니다. 두 입장은 배타적이기보다 서로 오가는 것입니다. 지식과 감상은 서로를 견인할 수 있습니다. 바흐의 수학적 선율의 힘은 모든 거리를 잠시 잊게 합니다. 심지어 가사를 몰라도 칸타타를 충분히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흐가 처했던 위치와 상황을 이해하면 감상의 폭과 깊이를 더 확장시켜줍니다. 또 바흐의 보편성은 음악 자체의 탁월함뿐 아니라 유럽 문화의 전지구적 확산과 식민지주의, 계급적 취향 등의 문제와도 얽힌 결과라는 점도 모른 척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닙니다. 감동 받기 위해서 앎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바흐 교회 칸타타』는 이 시간과 장소의 간극을 오가기 위한 작은 나침반입니다. 가디너의 『바흐: 천상의 음악』, 볼프의 『요한 세바스찬 바흐』 같은 평전, 바흐 아카이브 사이트 등과 함께 읽고 칸타타 전곡 듣기에 도전해보시기를 권합니다. “고통이 기억으로 번역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 테레사 학경 차, 『딕테』 고백부터 해야겠다. 나는 인간의 사회적 구성요건과 그에 기반을 둔 차별과 혐오 중 인종 문제에 가장 무지하다. 그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가해자가 될 가능성이 언제나 더 높다고 여기며 머지않아 더욱 가시화될 한국의 인종 문제를 두려운 마음으로 주시하고 있다. 유럽에 머물던 시기에 겪은 인종차별 경험이 적지 않지만, 한국에서 나는 ‘아시아계’ 여성이기보다는 더 자주 한국 ‘여성’으로 나를 인식한다. 캐시 박 홍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국 사회는 여성혐오가 인종적, 민족적, 계급적 연대를 압도하는 사례가 넘쳐나는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상에서 인종과 관련된 특정 주파수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이 부끄러운 고백은 캐시 박 홍의 『마이너 필링스』를 어떤 태도로 읽어야 하는가, 라는 고민으로 이어진다. 서문쯤에서 했어야 할 고민이지만 책을 반 가까이 읽고 나서야 석연치 않은 느낌에 독서를 멈췄다. 캐시 박 홍이 쓴 문장 속 ‘인종’의 자리에 나는 자꾸 ‘여성’이나 ‘젠더’를 대신 놓고 이해한 듯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한 개인 안에 교차하고 있는 주체와 타자의 위치를 맥락적으로 바꿔 이해해보는 시도라기보다 쉽고 기만적인 동일화에 가까웠다. 캐시 박 홍은 강박적이고 편협해질 위험을 무릅쓰고 인종 문제‘만’을 날카롭게 파고들고 있었다. 책의 어떤 부분은 복잡한 맥락을 의도적으로 생략하고 인종 이야기로 직진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젠더나 계급, 장애 유무를 포개어 선뜻 동일화나 이해를 시도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런 방식은 차이를 흐리고 실컷 파헤친 ‘그 문제’의 핵을 덮는다. ‘이것은 인종 문제다’라고 쓰고 있으므로 이것은 인종 문제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게 우선이었다. 충분히 그런 후에야 경험 안에 교차하는 차별적 조건들로 확장하거나 연결해도 될 터였다. 나는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조금 더 자유로워진 기분이었다. 자신의 감각을 의심할수록 무참하게 파고드는 소수적 감정이 그 이름을 얻었다. 겹쳐지지 않고 곁에 서니 이런 질문도 생겼다. 자기 경험 바깥의 것들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말해도 되는 걸까? 캐시 박 홍은 이 문제에 대해서 트린 T. 민하를 인용한다. 자기 체험 바깥에 있는 문화에 “관해 말하기”(speaking about)보다 그 “근처에서 말하기”(speaking nearby)를 제안한 트린 T. 민하는 제일 먼저 사람들 사이에 놓인 잠재적 간격을 인정하고 대표성의 공간을 남겨두라고 제안한다. “근처에서 말하기”는 타자를 대표/대신하거나 그 위에 군림해 발언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일이며, 우리는 그저 가까운 거리에서만 말할 수 있을 뿐이라는 걸 이해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의미를 규정하는 과정을 의도적으로 멈추고 그 의미가 봉쇄되지 않도록 의미 형성 과정에 여백을 남겨두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만 타자가 여백으로 들어와 그 자리를 원하는 방식으로 메울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상상하면 참 아름다운 일이다. 인종 문제에 대해 쓰기가 자신에 대한 도전이 된 캐시 박 홍에게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을지 모르겠지만. 그는 그동안의 자기변명과 모순의 저변에 무엇이 있는지를 비집어 여는 개인적 성찰과 동시에 1인칭 복수형 ‘우리’와도 씨름해야 했다고 고백한다. 그가 마지막 장에서 작정한 듯 반복하는 ‘우리’라는 1인칭 복수형은 ‘나’를 의미하는 ‘너’처럼 읽힌다. 엘렌 식수가 말한 “바로 사이(안에서) 작업하는 것”과 연결될 수도 있는 걸까 생각하면서, 자기 위치성을 지속적으로 질문하기를 제안하는 책의 힘에 이끌렸다. 그런 의미에서 『마이너 필링스』는 준비서다.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해 쓰면서도 캐시 박 홍조차 어떤 경험에 대해서는 “근처에서 말하기”만 가능하다는 것, 타자와의 관계에서 권위자의 위치를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사실상 자유를 위한 선택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주지시키는 준비서. 이렇듯 고통을 직시하는 강렬한 목소리의 지속적인 출현이 우리를 침묵에서 구해낸다. 캐시 박 홍이, 그보다 앞서 테레사 학경 차가 그랬다. 그의 대표작 『딕테』는 수많은 여성을 ‘말하는 여자’로 존재하도록 이끌었다. 말하는 여자들은 찢어진 언어, 망명자의 기억으로 이루어진 저항의 여성적 관계를 새롭게 꿈꿀 수 있었다. 출간 후 십여 년간 비교적 조용한 반응 안에 머물던 『딕테』는 일레인 킴을 비롯한 아시아계 미국문학 비평가들이 민족주의적 역사와 한국계 이민자들의 경험에 천착하는 비평적 관점을 제시하면서 재조명된다. 『자기 쓰기, 민족 쓰기』(Writing Self, Writing Nation)의 서문에서 일레인 킴은 동시대 비평가들이 『딕테』에 대한 논의에서 한국 혹은 한국계 미국인의 문제를 등한시하거나 무시했다고 지적하면서, 작품에서 재현하고 있는 구체적인 역사 즉, 일본 식민주의와 한국 민족주의 운동, 페미니즘, 한국전쟁, 미국 이민 세대 등에 대한 분석이 전무하다고 비판한다. 특히 1992년 4월 29일에 일어난 ‘LA 흑인 시위’는 『딕테』를 비롯한 한국계 미국인들의 민족주의적 텍스트를 소개할 필요성에 긴급함을 더했다. 당시 한인 타운과 LA 남부의 한국인 이주민 수천 명이 삶의 터전을 잃었다. 이는 얼마간의 시간을 건너 캐시 박 홍의 『마이너 필링스』가 미국에서 주목받은 배경과도 연결된다. 팬데믹 이후 아시아인을 대상으로 증오범죄가 크게 증가했고, 인종차별과 혐오, 배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여러 분야에서 주된 의제를 이끌고 있다. 말하자면, 테레사 학경 차와 캐시 박 홍을 잇는 아시아계 인종 문제는 첫 이민 세대부터 ‘지겹도록 새롭게’ 반복되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이 나라에 늘 있었던 존재다.” 『마이너 필링스』의 마지막 문장이다. 두 사람의 저항적 쓰기가 호출된 공통 정황은 자연스럽게 캐시 박 홍이 차의 죽음을 추적한 글 ‘예술가의 초상’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이 글은 번역이 되기 전에 급하게 원서를 찾아 읽었다. 그만큼 궁금해서 서둘러 펼친 첫 장면부터 나는 당혹감을 느꼈다. 테레사 학경 차가 『딕테』에서 영화관 안의 여성을 묘사하며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시선의 권력을 환기하는 데 반해 캐시 박 홍은 바로 그 권력의 시선으로 차가 살해당한 당일의 행보를 쫓기 시작한다. 그의 카메라를 따라가던 나는 자꾸 주춤거렸다. 오직 한 가지 목적, 테레사 학경 차의 죽음을 둘러싼 장막을 걷어내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실만을 기록하기 위해 그는 돌연 이전 글과는 다른 시선을 가져온다.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적 시각을 견지한 사실적 기록만으로 강력한 역사를 세울 수 있다고 믿는 백인처럼 캐시 박 홍이 이성적으로 억지를 부리는 듯한 순간들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학경 차의 죽음, 사건 조사, 재판 과정, 언론에서 드러난 분명한 차별과 혐오를 문제 삼는 것과 그의 마지막 모습을 범죄사건 보고서처럼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별개의 선택이다. 전자의 이유로 후자가 필연적이진 않기 때문에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는 차를 어떻게 기억하고 싶었던 걸까? 혹시 시인이기도 한 그가 자신에게 중요한 영향을 준 예술가의 죽음을 어떤 자의식 없이 기록하기 위해 무리한 진술 방식을 선택한 건 아니었을까? 아쉬움이 남는 글이었지만, 반복되는 역사 속 두 사람의 관계와 그 의미는 내가 미처 짐작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터였다. 캐시 박 홍 역시 한국의 여성들이 테레사 학경 차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전혀 짐작하지 못한 듯하다. 캐시 박 홍이 자신은 살 수 없다고 단언한 한국에도 테레사 학경 차를 사랑하는 여성들이 있다. 1997년 『딕테』가 처음 출간된 때부터 『딕테』를 함께 읽고, 『딕테』를 연결하고, 『딕테』를 계속 살아가게 하는 여성들이. 나도 그중 하나이다. 우리는 그녀의 죽음 앞에 어떤 수식어를 두어야 할지 매년 11월 5일마다 고심한다. 우리가 읽은 문장들에는 이런 표현들이 있었다. 비참한, 드라마 같은, 잔인한, 참혹한, 비극적인, 안타까운… 우리가 고개를 돌린 건 죽음이 아니라 그의 죽음을 가두는 수식어들이었다. 다 치우자. 그것은 그저 ‘원치 않은’ 죽음이었다. 테레사 학경 차 자신도, 그 가족들도, 그로부터 한참 미래의 우리들도. 움직이는 환유의 세계인 『딕테』가 끝없이 반복하고 부연할 이미지와 언어화를 우리에게 제시하듯이 그의 죽음에 대해서 우리는 거듭 여백을 만들고 “근처에서 말하기”를 이어갈 것이다. 앞으로는 『마이너 필링스』도 그 곁에 있을 것이다. 2021년 11월 5일 해 질 무렵 『딕테』를 펼쳤다. 몇 번째인지 알 수 없고, 앞으로 몇 번이 더해질지도 모르는 채로. 테레사 학경 차는 39년째 이 세상에 부재중이다. 없는데 있다. 그렇다는 걸 캐시 박 홍이 쓴 『마이너 필링스』를 읽으며 거듭 확신했다. 그는 책의 마지막에서 자신이 테레사 차에게 빚졌다고 썼다. 자기 언어가 자신을 끊임없이 소외시키는 경험 속에 있는 이들이라면, 말을 할 때의 외로움과 할 수 없는 괴로움 사이에서 분열하는 이들이라면, 집에 왔으나 한없이 집에 가고 싶은 이들이라면 마찬가지로 테레사 차에게 빚졌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어쩌면 이제 누군가는 캐시 박 홍에게도 그랬다고 쓰게 될지 모른다. 『딕테』가 처음 출간된 1997년부터 테레사 학경 차를 사랑하는 여성들과 『딕테』를 읽었다. 여성적 글쓰기와 여성노인 서사에 관심을 두고 개인 연구와 여성/노인 대상 예술 수업을 진행 중이다. 『100세 수업』, 『아무튼, 연필』을 썼다. ❝ 요상한 요리책 ❞ 늑대를 누가 먹길래! 흠칫 놀란 손으로 열어본 이 책은 '전쟁 레시피'였습니다. 질 낮은 배급 식량과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하는 전쟁통에 레시피라는 게 가당키나 할까 싶지만, M. F. K. 피셔는 그럼에도 인간다운 식사를 가능케 할 조리법을 소개해요. 실용적이고 우울한 우스개가 종종 튀어나오는 별난 요리책입니다. 🔇 모베
초판이 1943년에 나온 커피에 관한 고전. 번역서는 2006년판. 18-19세기 독일 사람들이 얼마나 커피를 좋아했는지, 바흐가 커피 칸타타를 쓴 이유를 알 수 있는 책. 커피에 대해 쓰면서 “물질이란 없다! 예로부터 인간의 정신과 관계를 맺고, 역사의 흐름에 따라 이 정신에 의해 전해진 것, 그것은 바로 정신사 그 자체다”라고 단언하는 첫 페이지부터 독일 커피향이 물씬 난다. 🦻 팔랑 맛에 미쳐 벌어지는 피비린내 진동하는... 아, 아니.. 고소함vs.상큼함이 대폭발하는 전쟁사.
땅콩과 오이가 버터와 피클이 되기까지, 아찔하고 코믹한 땅콩공화국과 오이제국군의 (군침 도는) 참상. 💥💣『앗 뜨거워』 (해냄, 2007) 🧼 퐁퐁 이탈리아 사람에게 요리를 배운 요리사에게 요리를 배운 또 다른 요리사에게 요리를 배우다가... '진짜'를 찾아 이탈리아로 떠난 전직 『뉴요커』 기자의 에세이. 시종일관 '앗 뜨거'와 '앗 따가'를 외치다가도 궁극의 파스타 면을 만들려면 밀가루에 달걀 몇 개를 풀어야 하는지 알아내고자 볼로냐 중세요리 연구자를 찾아가기도 하는 집념이 매력적이에요. 이 책을 읽고 저도 판자노에 있는 푸줏간에 가서 '고기의 신'을 만나고 왔어요.😇 ❝ 사과 샤베뜨를 넣은 에스프레소, 드셔보셨나요? ❞ 🦈 조스바 지난 각주 23호*에서 소개한 리사르 커피 에스프레소를 기억하시나요? 조스바는 더 다양한 에스프레소바를 원했고, 이번엔 합정동의 "에스프레소바 슈가"로 향했습니다. 에스프레소는 종류가 다양하고 각 바마다 독특한 메뉴를 가지고 있기에 슈가에서 유명한 에스프레소가 무엇인지 미리 검색해보고 방문했답니다. 조스바의 목표는 소르베또 알라 멜라.ᐟ 소르베또는 샤베트, 알라 멜라는 사과가 들어있다는 뜻...ᐟ (이탈리아어로 아는 단어는 음식 몇 개뿐) 세상에, 에스프레소 샤베트와 사과 샤베트 위에 오렌지 마멀레이드를 올리니 그 모습도 참 아기자기하고 꼴딱꼴딱 넘겨버리고 싶더라고요. 침을 몇 번씩 삼키다가 근무 중에 슈가로 갔습니다(각주를 핑계로 혼자 에스프레소 마시러 감). 그래 이번에도 두세 잔은 시켜야지 다짐하고 바에서 먼저 두 개를 시켰습니다. 리사르와는 메뉴가 좀 달랐어요. 메뉴판 상단에 두 잔 세트 구성이 여섯 가지 정도 있고, 세트의 분류도 트레디셔널과 모던으로 나뉘어요. 에스프레스바에 와서 당연히 두 잔은 마셔야지 한 잔이 말이 되나? 하는 느낌의 메뉴판이었어요. 트레디셔널 에스프레소는 까라멜로 블렌드 원두를 쓰고, 모던 에스프레소는 싱글빈이예요. 싱글빈은 종류가 다양하고 매번 라인업이 바뀝니다. 트래디셔널 세트로 소르베또 알라 멜라가 있는 세트를 주문했습니다. 트래디셔널 에스프레소는 이전에 먹었던 리사르보다 좀 더 강렬한 맛이었어요.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리사르보다는 분명 더 강렬했어요. 기대했던 소르베또 알라 멜라는 정말 향긋하고 완전 새로운 음료 같았어요. 주문한 에스프레소를 다 마셨더니 한가한 때에 왔으니 한 잔 더 주시겠다고 해서 두 잔을 더 얻어마셨습니다. 독특하고 좋은 원두라며 딸기 맛이 나는 에스프레소를 주셨는데요, 정말 딸기 시럽을 먹는 착각이 드는 에스프레소였어요. 커피에 대한 설명도 굉장히 자세히 해주시고 마치 1:1 커피 강좌를 듣는 기분이었어요~! 😁 책 좋아하는 친구가 떠올랐다면? |
편집진이 띄우는 책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