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들부들하고 까끌까끌한 종이 질감, 종이 냄새, 화면으로 볼 때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미묘한 색감, 묵직한 블랙, 서서히 옅어지고 진해지는 그러데이션… 두 손으로 책을 잡고,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겨봐야만 전해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책의 물성이 주는, 대체할 수 없는 매력이죠. 북 디자이너는 작업할 때 바로 이런 부분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너머를 고민하며 우리의 독서 경험을 확장시켜주는 일을 하는 것 같아요. 『마이너 필링스』 디자인을 담당한 김동신 디자이너가 사소한 감정들을 그러모아 어떻게 작업했는지 직접 이야기를 전합니다.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장 무섭고 두려워하는 단어는 '절판' 아닐까요? 그래서인지 뉴스레터 피드백에 종종 '절판된 책'을 소개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오곤 했어요. 이번 Footnoters' Pick에서 확인해보세요. 😉 참, 8월과 함께 스위스 그래픽 디자이너 요스트 호훌리(Jost Hochuli)의 전시도 끝난다고 해요. 살짝 맛보기하시고 서둘러 관람 예약하세요! 사소한 감정들이 주도한 작업: 『마이너 필링스』 디자인 후기 📬 김동신 디자이너 디자인 후기를 써달라는 편집자 님의 문자에 답장을 보내 놓고 조금 난감했다. 스스로 디자인한 것이라도 글로 쓰기 쉬운 것이 있고 어려운 것이 있는데 아무래도 『마이너 필링스』는 후자에 속하는 책이었기 때문이었다. 왜 이렇게 했더라. 최종 결과물이 나오기까지 작용하는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디자인 대상이 놓여있는 여러 맥락에서 얻게 되는 정보들이 디자인에 당위성을 제공한다면, 이것은 이렇게 생겼으면 좋겠다 혹은 생겨야만 한다라는 충동은 작업 과정을 끌고 가는 동력이 된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의견도 빼놓을 수없다. 사실 일을 하는 동안에는 이 모든 것들이 얽혀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에 무엇이 어디에 해당하는지 깔끔하게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이제까지 디자인 후기를 써야 할 때면 대체로 첫 번째 요인을 부각하는 방향으로 써왔던 듯하다. 그런 글은 쉽게 쓸 수 있다. 왜 그럴까. 그것들만이 남에게 밝힐 가치가 있는 요인이라서? 디자인은 ‘합목적적 문제 해결’이라는 학생 시절 받은 교육이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걸까? 디자인의 감각적인 부분을 표현하기 위해 으레 쓰이는 표현들 — ‘○○한 콘셉트를 표현/의도했다’ — 은 쓰고 싶지 않은데. 무엇이 이유가 되었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감정과 관련된 것들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프로답지 못한 것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마이너 필링스』의 표지 디자인은 명백하게 ‘이러면 좋겠다’는 사소한 감정들이 주도한 작업이었다. 그것들을 밝히자면 다음과 같다.
늘어놓고 보니 역시 뭔가 좀 시시하다. 더 파고들어 가면 어쩌면 쓸 만한 글이 나올지도 모르지만 굳이 왜 이런 말을 하게 되었는지 주절주절 설명하다 보니 주어진 분량을 한참 전에 초과해버리고 말았다. 캐시 박 홍 선생님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쓰셨나요… 편집자 님께 후기를 보내고 나서 책을 다시 읽어봐야겠다. * 사진: 『마이너 필링스』 면지, 두성 리프지 123 8000킬로미터를 날아온 불티 🌱 죽순 1987년이었습니다. 한국에 1가구 1전화 시대가 열렸고, 서울 올림픽 개막이 코앞이었죠. 그해 8월 15일, 8000킬로미터 거리를 뛰어넘어 독일에서 “우리가 불을 질렀다”라며 성명서가 하나 발표됩니다. 한국후레아패션 여성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을 지지하기 위해, 독일 본사 아들러의 옷가게들에 불을 지른 여성들이 쓴 것이었죠. 이들은 급진 페미니스트 게릴라 조직 ‘로테 초라’(Rote Zora)입니다. 저는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에서 이들의 존재를 알았습니다. ‘방화’라는 폭력적이고 강력한 수단으로 투쟁하는 모습은 ‘서프러제트’ 말고는 처음 보았어요. “젠더에 의한 어떤 억압도 없는 해방된 사회를 꿈꾼 로테 초라는 가부장적 구조와 성차별, 성폭력 가해자 공격을 목표로 1977년부터 1995년까지 약 45건의 방화 공격을 가해 수백만 유로 상당의 재산 피해를 냈”습니다. 물론 인명 피해는 전혀 없었고요. 과격하고 위험한 방식이지만, 그 기세와 의지가 느껴졌습니다. 그들이 “타오르는 불길로 한국 여성 노동자들에게 보낸 연대”가 제 안에 뜨겁게 남았습니다. 이런 흥미진진한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뒀을 리 없죠. 레즈비언 필름 콜렉티브 ‘라스 오트라스’가 로테 초라의 활동을 추적한 다큐멘터리 「여성들이 갱 조직을 만든다」를 제작, 독일에서는 2019년 상영됐습니다.
아직 자리가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서둘러 예매하세요! (시간표 확인👀)
📢 로테 초라의 1987년 8월 15일자 성명서 (번역기의 힘을 빌린 터라 오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들러를 공격하다
“삶의 질”
이건 아들러 의류회사의 광고 문구다.
대체 누구의 삶, 어떤 질을 말하는가?
한국 여성들의 투쟁이 한창이다.
투쟁 장소: 이리 수출자유지역 소재 후레아패션 공장
지난 4월 초, 1600명의 노동자(약 90퍼센트가 여성)가 임금 인상과 노동 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9일 동안 파업 투쟁을 벌였다. 아들러 독일 경영진은 깡패 용역을 고용하고 공권력 투입을 허용하며 여성 노동자들을 잔혹하게 진압했으며, 13명의 대변인이 사전 통보 없이 해고되고(그들은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이후 일자리를 구할 수 없을 것이다) 노동자 69명이 체포되었다.
후레아패션에서 일한다는 건 다음을 뜻한다.
임금 “노예제”는 사실상 여성의 성차별적 착취에 기반한다. (…) 최고 경영자인 아들러는 “한국의 흑발과 눈동자가 없었다면 아들러의 눈부신 성장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라며 독일 내 행사에서 한국의 여성 노동자들을 치하한다. (…) 각국이 서구의 다국적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여성 노동자의 “빠른 손가락”과 “순종”을 강조하며, 생산자유지구를 지정해 면세 등의 혜택까지 주고 있다. 이 지구 내 공장 노동자의 절대 다수가 여성이다. (…) 젊은 여성들이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건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성매매다. 한국에 파견된 4만 명의 미군과 제국주의 국가에서 온 수많은 남성들에게 말이다. 다른 하나는 착취적 노동이다. 저임금으로 일하다가 수익성이 떨어진다며 25세엔 해고된다.
미국이 경제적, 군사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한국의 독재 정권은 서구 다국적 기업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있다. 야당마저 잔인하게 탄압한다. 저항은 반자본주의자, 반제국주의자, 애국주의자, 공장 내 노동자 조직, 1980년 광주혁명의 기억을 생생하게 간직한 민중들, 그리고 철거에 저항하는 빈민들과 그들의 투쟁에 대해 듣는 학생들의 것이다. (…) 아들러가 공장을 다른 국가로 이전하겠다는 위협은 소용없다. 여성들의 집단 투쟁 경험은 국경을 넘는다!
1987년 6월 21일 밤, 우리는 아들러 컨소시엄 본사에 폭탄을 설치해 경영 부처 일부를 파괴하려 했다. (…)
우리의 투쟁은 제국주의가 초래한 관계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 실질적이고 실용적인 반제국주의 행동으로서, 자본 전략의 진행을 막고, 착취와 억압에 대항하는 모든 투쟁과 연대하고자 한다.
1987년 8월 15일, 하이바흐 소재 아들러 본사에 대한 이번 공격은 할스텐벡, 브레메, 올덴부르크, 이제른하겐, 카셀, 홀츠비케데 등 여덟 곳 자회사들에 대해서도 동시에 이어졌다.
로테 초라 ❝ 다시 출간되길 바라는 절판 책 ❞ 🔇 모베, 『미술사의 기초개념』 하인리히 뵐플린의 『미술사의 기초 개념』. “선적인 것과 회화적인 것” 등의 쌍이 등장하는 미술사의 고전. 1994년 시공사에서 펴낸 한국어판은 꽤 널리 읽혔습니다. 1990년대 후반까지 1년에 1쇄 정도를 찍었죠. 퍼블릭 도메인이고 충실한 번역이 있으니, 어디선가 다시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뵐플린을 요즘 누가 읽어’라는 핀잔이 들리는 것 같네요. 🧼 퐁퐁, 『다락방의 미친 여자』 다락방에 갇힌, 다락방에 스스로를 은닉시킨 미친 여자들의 우울, 광기, 분열에 새로운 언어를 부여하는 책입니다. 남성 중심 문학사에서 문학 작품의 지도를 새롭게 그려나가는, 지금도 여전히 의미 있는 비평서인데요. 글의 밀도와 분량을 보면 복간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 같지만… 어디선가 이 책이 나온다면 한 권 더 소장하겠어요! 🦈 조스바, 『독약』 프랑수아즈 사강의 환각 일기라는 부제로, 무려 베르나르 뷔페가 그린 책입니다. 뷔페의 바늘같은 선들은 모르핀에 중독되어 치료를 받는 사강의 상황과 한몸같이 어울립니다. 사강의 일기는 짧지만 날카롭고, 뷔페의 그림이 그 주위를 가득 메워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강렬한 인상이 중첩됩니다. 사강과 뷔페의 만남인데 절판시킬 수 없어요! 🌱 죽순, 『개의 날』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개를 목격한 여섯 사람의 이야기가 담긴 소설이에요. 5,500원이라는 고랫적 가격과 위에서 누른 듯 옆으로 늘인 서체, 절취선 있는 ‘독자 엽서’까지 1999년의 시간을 담고 있어서 괜히 더 애틋한 책입니다. 각주 구독자 중에 혹시 열림원 편집자 분 계신가요?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 시리즈를 복간해주세요😭 ❝ 만질 수 있는 아름다움, 요스트 호훌리의 북디자인 ❞ 🦈 조스바 몇 달 전 Zoom을 이용한 온라인 워크숍, <장크트갈렌의 목소리 : 요스트 호훌리의 북디자인> 강연이 있었어요. 스위스 그래픽 디자인의 거장인 요스트 호훌리의 북디자인을 그의 목소리로 직접 들을 수 있었는데요! 3회에 걸친 강연을 듣고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전시에 대한 안내를 받고 정말 기뻤어요. 북디자인은 반드시 실물로 보아야 멋짐을 제대로 느낄 수 있잖아요? 강연에서 소개한 <튀포트론>, <에디치온 오스트슈바이츠> 시리즈 전권을 볼 수 있다니. 강연이 끝나고 전시가 열리기를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호훌리의 디자인은 가독성을 중시한, 섬세한 타이포그래피가 특징이에요. 글자의 서체와 크기, 두께 등을 매우 절제해서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유연하게 활용하고 조금씩 변주를 줍니다. 사진을 두는 방식도 마찬가지에요. 페이지마다 더 알맞는 위치에 놓기 위해 세워둔 그리드에서 조금씩 벗어난 레이아웃을 만듭니다. 그는 "이런 것 같습니다", "이런 느낌입니다"와 같은 직관적 선택을 합니다. 그런 섬세함과 절제, 유연함 등이 실제로 펼쳐 든 책에 촘촘히 얹어져 있었고, 작고 섬세한 타이포들은 묵직하게 잉크로 인쇄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장크트갈렌의 지역에 관한 콘텐츠로 책을 만들었는데, 돌멩이와 나뭇잎 등 실제 크기로 넣은 부분이 인상 깊었습니다. 실물은 훨씬 더 아름답더군요. 책을 만지고 펼치는 데 책이 조금이라도 상할까 봐 엄청나게 긴장하면서 책장을 넘겼습니다. 전시를 너무 늦게 소개한 감이 없지 않지만 서둘러서 전시장에 들러보시길 권합니다. 디자이너가 아니라도 정말 즐거운 경험이 될 거예요! ![]() ![]() 책 좋아하는 친구가 떠올랐다면? |
편집진이 띄우는 책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