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에는 마티의 친구 두 분이 참여해주셨어요. 무슨서점 대표님이 에세이 세 편을 골라 소개해주셨고, 정지혜 영화평론가가 제12회 스웨덴영화제 개막 소식을 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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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수급생활자로 살아온 97년생 저자 안온은 '요즘' 가난이 어떤 모습인지 일인칭으로 써 내려갑니다. 거침없이, 그러나 신중하게 쓰인 『일인칭 가난』 출간 전 연재를 시작합니다. 11월 출간 예정이에요.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4화 세부의 맛
아빠가 죽고 스물한 살의 나는 적금 통장을 탈탈 털었다. 나만 다녀왔던 미국 서부 여행[초록우산재단의 후원 사업]을 엄마와 함께 가기 위해 찔끔찔끔 모으던 자금이었다. 7-8년 모아야 할 돈이었는데, 아빠의 돌연한 죽음에 상처 입은 모녀관계를 돌보는 이벤트가 필요해 깨버렸다. 엄마도 비상금 100만 원을 내놓았다. 우리 모녀는 필리핀 세부 여행 패키지를 끊었다.
세부의 최고급 리조트라는 샹그릴라 막탄 세부에서 3박을 보냈다. 당도 측정기를 망가뜨릴 것처럼 다디단 망고를 먹었고, 인공 바다에서 디즈니 영화에서나 보던 열대어들과 수영을 했다. 처음 해본 거 티 나니까 쭈뼛대지 마와 살다 보니 별걸 다 해보네를 오갔던 3박 5일은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황홀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칠리크랩은 역시 세부지, 맥주는 역시 세부지, 스파는 역시 세부지, 하며 엄마와 나는 단 하나 쥐어진 추억 사탕을 할짝할짝 핥았다.
세부 여행이 달콤했던 것만은 아니다. 패키지여행 버스가 지나는 도로 옆으로 판잣집이 빼곡했다. 버스가 신호에 걸려 서면, 아이들이 버스에 다닥다닥 붙어 여행객들을 향해 손가락 욕을 했다. 들리지 않았지만 입술 모양이 적나라하게 F**k You를 그렸다. 그들 사이에서 어릴 적 내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화명주공이 재개발되기만을 기다리며 수시로 찾아오던 양복쟁이들에게 내가 눈을 흘겼던가. 디즈니랜드 기념품 가게에서 품 안의 달러를 만지작거리면서 한숨을 쉬었었나, 욕을 삼켰었나. 순간 멀미가 날 것 같았다. 저 아이들을 나와 동일시하는 것은 내 피해의식이었다. 그저 욕을 달고 사는 10대 청소년일지 누가 알까. 차창에 비친 내 얼굴에서 눈을 돌렸다. 까무룩 잠이 든 엄마의 얼굴은 보기 드물게 평화로웠다.
마지막 날에는 스파에 갔다. 화사한 웃음처럼 핀 칼라추치 사이에서 우리 모녀는 여행의 피로를 풀었다. 피로를 푼답시고 몇십 분씩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행위와 시간이 낯설었다.
엄마와 나를 마사지해준 관리사 여성 둘은 스물셋이라고 했다. 엄마의 어깨를 꾹꾹 누르던 관리사는 매일 받는 일당으로 동생 네 명을 부양한다고 했다. 엄마에게 통역을 해주었다. 엄마는 별 내색 없이 내가 전해주는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마사지가 끝나자 엄마는 원래 주려던 팁의 세 배를 지불했다. 생각지 않은 비용을 써서 찔렸는지, 내가 열렬히 동조해주지 않아 겸연쩍었는지 엄마가 덧붙였다. 발바닥의 굳은살을 손톱으로 다 긁어주더라. 너무 시원하고 감사하고 황송해서 안 그럴 수가 없었다니까.
모녀가 아껴 먹는 사탕의 끝 맛은 쓰고 맵고 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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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졸(倉卒)
미처 어찌할 사이 없이 매우 급작스러움.
“중동의 많은 ‘국가’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오스만 제국이 해체되면서 등장했다. 국가 개념이 익숙하지 않은 제국의 백성들은 ‘국가’ 또는 ‘국민’이라는 생경한 정체성을 갑자기 부여받았다. 혼란스러웠다. 하나의 민족공동체가 창졸간에 분리되기도 했고, 반대로 견원지간의 부족과 종파가 느닷없이 한 나라로 묶이기도 했다.”
― 인남식,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70년의 교착」, 『시사인』, 제589호, 2018년 12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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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건축』 개정증보판은 언제 출간 예정일까요? |
하아... 저희도 오매불망 기다리는 중입니다.
문제는 몇 년 사이 인쇄업이 크게 위축되어 제본소의 수가 감소해 일이 밀린다는 겁니다. 특히 실 제본을 하는 곳이 많이 사라졌다고 해요.
그나마 10월 전에는 사정이 좀 나은데, 10-11월에는 각종 정부 지원 사업의 결과물들이 몰리면서 인쇄, 제본의 병목현상이 심해집니다.
물량이 몰리는데 제본소 기계와 노동자 수는 한정돼 있으니 사고가 날 확률이 높아지고, 제작 사고가 나면 또 일이 밀리는 악순환이 벌어지죠.
지금 『현대 건축』은 실 제본까지 마치고 마지막 표지를 붙이는 단계에서 멈춰 있습니다. 하루 또는 이틀이 더 걸릴 것 같아요.
그래도 이번주에는 어찌어찌 서점에 배본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봅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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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 구술집』을 절판 뒤 구해보겠다고 작년에 몇 달을 온 서점 사이트와 오프라인 서점을 뒤지다가 결국 정가의 두 배로 올려놓은 온라인 중고서적 판매자에게 연락해서 흥정한 끝에 5만 원에 구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그래서 올해 『HURPI 구술집』 출간될 때 부수도 많지 않다 하셔서 나오자마자 사뒀지요. 아직 10퍼센트도 읽지 않았지만 괜찮습니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부릅니다. 어차피 읽을거니까요. ㅋㅋ
절판 전에 책을 미리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절판이란 걸 알게 되면 더 구해서 보고싶어서 더 큰 노력을 하고 결국 손에 넣어요. ㅋㅋ 그래서 어느새 제 책장엔 절판본 중고책들도 늘고 있습니다. 출판사에까지 연락해보고도 끝내 못 구한 책도 있지만요;;;
편집자님들도 이런 노력해보신 적이 있나요? 책을 절판하실 때는 그래도 출판사에선 보관본(?)을 좀 두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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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집은 워낙 적게 제작하는 데다, 힐튼 호텔 이슈와 함께 빠르게 소진되어서 구술집 중에 가장 빠른 절판 속도를 보여주었어요. 어렵게 구하신 만큼 『김종성 구술집』을 재미있게 읽응셨으면 좋겠어요.🙂
당연히 마티 편집자들도 뒤늦게 알게 돼 놓친 책들을 구하고 싶어서 몸이 달을 때가 있는데요, 중고 책 가격을 보면 전투력이 슈슈슉 떨어지더라고요. 그래서 보통은 도서관을 이용합니다.
마포평생학습관에서는 사회, 정치 현안과 맞닿은 책들을 쉽게 구할 수 있고, 마포중앙도서관은 소설이 확실히 많은 것 같아요. 장서가 다양한 편인 남산도서관에서 택배 대출을 할 때도 있습니다. 종착역은 역시 국회도서관이죠. 대출이 안 되니 관내 열람으로 만족해야 하지만, 필요한 부분은 복사를 하기도 합니다.
제가(🌱죽순) 지금 애닳아 하는 책은 김영옥 선생님의 『이미지 페미니즘』인데요, 일다에 전화를 해볼까 말까 망설이는 중이에요.
책을 절판해야 할 때가 다가오면 반품된 책들도 알뜰하게 챙겨서 보관본을 만듭니다. 구독자님처럼 출판사에 연락해서라도 책을 구하시려는 분들을 위한 최소한의 조치이자, 마티의 지난날에 대한 기록이면서 앞으로 마티에 새로 합류하게 될지도 모를 누군가를 위한 아카이빙이기도 합니다. 야금야금 내보내다 보면, 어느 날 “이 책 두 부밖에 안 남았어!” 하며 소스라치기도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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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서점의
새로 읽기 시작한 책, 읽고 있던 책, 또 읽는 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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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 읽기 시작한 책
송길영, 『시대예보 : 핵 개인의 시대』
얼마 전 애니메이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봤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임이 분명하더군요. 제목의 질문은 결국 자문하는 말 같았고요. 영화관을 나오며 저 스스로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는 건 예정된 수순이었습니다. 그러던 차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요. 겨우 첫 챕터를 읽고선 앞선 물음에 해답이라도 얻은 듯 후련한 기분을 맛봤습니다. 막힘없이 읽히는 속 시원한 통찰들이 그간 품어온 질문에 하나하나 답을 내어주는 덕분입니다.
책은 지금이 ‘핵 개인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쪼개지고 흩어져 더욱 홀로 서게 되는 개인이라서 ‘핵 개인’이지요. 더불어 개인의 ‘역량’을 끊임없이 고민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시대라고도 합니다. 권위, 조직,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 갇힌 기성 문법에서 벗어나야만 그것이 가능하고요. 다가올 삶을 예측하는 ‘시대예보’들 그리고 이 시대엔 ‘이렇게 살아가라’라는 거침없는 당부들이 책 속에 가득 담겨 있습니다.
○ 읽고 있던 책
브라이언 딜런(저), 김정아(역), 『에세이즘』
에세이를 주로 다루는 서점을 운영하면서, 장르에 갖는 자부심만큼이나 장르 폄하에 의한 피해 의식도 커지게 되었습니다. 시작은 그저 ‘에세이가 좋아서’ 였건만. 요즘은 움츠러든 어깨를 하고 우리가 에세이를 읽어야 하는 이유와 명분과 입장을 좇습니다. 여기서나 그러고 있는 줄 알았는데요. 다른 나라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입니다.
작가는 위대한 에세이스트들의 작품을 낱낱이 독해하며 에세이라는 장르를 탐구합니다. 적확한 사실로 장르를 옹호하고, 뻔하지 않은 칭찬을 합니다. 책을 읽다 보면 ‘그래! 그래서 내가 에세이를 좋아했지!’, ‘더 좋아해도 되는거지!’ 하며 고개를 주억거리게 됩니다. |
○ 또 읽는 책
고명재,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초여름 생기 넘치는 햇살을 쬐며 읽었고, 최근 서늘해진 바람결을 만끽하며 또 읽는 책입니다. 곳곳에 서리가 앉을 무렵이 되면 다시 또 읽을 책이지요. 시인의 시야에는 “그 흔한 게 얼마나 기적적인지”(p,184). 지나치고 흘려버리기 일쑤인 것들이 그의 시선으로 투과되어 아름답고 다정한 문장이 됩니다. 이 한 권의 책 덕분에 “삶은 앞으로 얼마다 더 다채로울까”(p,187) 하며 덩달아 긍정하고 맙니다.
“별, 시, 눈, 꽃, 귀, 손, 개, 국, 볼, 종, 빛, 빵.
나는 시 쓰고 동생은 빵을 굽는다. 우리의 직업은 한 글자라서 사랑이라네.”(p,1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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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 위켄더에 정지혜 영화평론가(인스타그램 @hwasile153)가 제12회 스웨덴영화제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올해로 12회를 맞은 스웨덴영화제가 11월 1일에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개막했습니다.
올해는 9편의 상영작과 구벤 외스틀룬드 감독의 「슬픔의 삼각형」을 특별 상영합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사미 스티치」의 토마스 잭슨 감독과 주인공 브리타 마라카트-라바 작가와 지난여름 미리 화상으로 만나 대화를 나눴고요, 그 영상은 영화 상영 후 극장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개박작은 13살 소녀의 용기 어린 성장 드라마 「코미디 퀸」입니다. 지난해 베를린국제영화제의 제너레이션 K 플러스 부문에서 작품상을 받은 산나 렌켄의 작품입니다.
「오베라는 남자」, 「문 오브 마이 오운」으로 국내 관객들에게도 잘 알려진 하네스 홀름의 가족 드라마 「크리스마스 선물」, 스웨덴의 퀴어 영화사를 단숨에 읽어 보게 하는 에바 벨링의 매력적인 아카이브 필름 「편견과 오만: 스웨덴 퀴어 영화사」, 전기 영화 「내 모든 사랑을 불태워」, 「아이 엠 즐라탄」, 「힐마」, 정통 사회파 드라마 「보이 프롬 헤븐」, 「이민자들」입니다.
그 가운데 「사미 스티치」를 추천해 봅니다. 세계적인 자수 예술가, 텍스타일 아티스트로 활동하는 브리타 마라카드-라바의 예술 세계를 조명하는 동시에 그녀의 삶의 터전이자 정체성의 뿌리이며 창작의 원천인 사미족의 신화, 전통, 역사, 문화, 정치, 철학에 관한 영화입니다. 사미족은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러시아 콜라반도 북쪽으로 가로지르며 펼쳐진 사프미 지역에 거주하는 토착 원주민으로 스웨덴의 공식 소수민족 중 하나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땅과 문화를 지키기 위해 어떻게 싸워왔는지, 세계적 기휘 위기로 그들의 현재 삶이, 브리타 이후의 세대가 어떠한 위협에 직면했는지를 전해 옵니다. 무엇보다도 사프미 땅의 차갑고도 뜨거운 숨결과 한 땀 한 땀 아로새긴 브리타의 놀라운 작품을 만나는 감동이 있습니다.
덧.
🌱죽순: 언제나 믿음직한 정지혜 평론가의 추천에 따라 「사미 스티치」를 예매했습니다. 티켓이 1,000원입니다. 1만 아니고 1천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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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 마티
matibook@naver.com 서울시 마포구 잔다리로 101, 2층 (04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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