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시 박 홍의 시집 『몸 번역하기』를 만나기에 앞서
🌱죽순
『몸 번역하기』에 「캣 스캔」(컴퓨터 단층 촬영)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잘 알고 있죠. 캐시 박 홍이 『마이너 필링스』에서 슬쩍 말했던 반측안면경련증에 대해서요.
“반측안면경련증 진단을 받은 것이 바로 아이오와에서 공부할 때였다. 카페인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틱 장애가 점점 더 악화되어 내 생각에는 사람들이 말은 안 해도 날 보면 금방 알아차렸던 것 같다. 컴퓨터 단층촬영을 예약한 날 아침 일찍 일어났던 기억이 난다. 나는 자동으로 움직이는 환자용 테이블에 누워 기계 안으로 천천히 미끄러져 들어갔다. 촬영기 내부는 매끈하고 하얀 원통 모양이었다. 속이 텅 빈 거대한 딜도 안으로 들어간 느낌이었다. 온몸에 전기가 통해 뇌가 망가지는 느낌이었다.” _36쪽
시 「캣 스캔」이 쓰인 이유를, 시에서 묘사된 상황과 감각을, 그의 첫 시집 『몸 번역하기』 출간 20년 후에 나온 산문집을 통해 이해하게 되다니. 시인에게는 과거의 것이나, 2024년에 이 시집을 만나는 우리에겐 현재인, 시간의 선형성을 꼬아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한 듯한, 오묘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몸 번역하기』를 만나기 전, 『마이너 필링스』를 한 번 더 읽어보세요. ‘시’를 염두에 두고 읽으면, 전에는 곁눈질로 보았던 문장들이 동공에 새겨질 거예요. 제가 새긴 문장들을 나눠봅니다.
⧫︎
︎︎︎아이오와 문예창작 과정 동창이 “신랄한 혹평가”라는 가면 뒤에 겁쟁이처럼 숨어 포스팅한 “시-인종 청소하기”라는 제목의 블로그 글을 발견했을 때도 나의 그런 신념은 여전했다. 그는 내 첫 시집이 정체성 정치를 다루는 진부한 시라며 혹평했다. ⋯ 능력이 중간치밖에 안 되는 이 모든 소수자 시인, 그러니까 나 같은 시인을 전부 박멸해야 문단이 개선될 거라고 장담했다.
화가 난다기보다 마음이 상하고 수치심이 들었다. 심지어 약간은 작성자의 말이 맞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내가 정체성 정치만 내세우는 흔해 빠진 시인이 아님을 증명하려고 그토록 애썼건만, 그가 나를 지성이 부족한 정체성주의자라고 폭로해버린 것이다. ⋯ 누구든 그일 수 있었다. _34쪽
⧫︎
︎︎︎나는 진지하게 시를 쓰기 시작한 이래로 부정확한 영어를 이용했다. 마치 아마추어 연주자가 전문 오케스트라에 들어가 엉뚱한 부분에서 심벌즈를 울리거나 도입부보다 먼저 플루트 연주에 들어가듯 용어 선택을 실험했다. 고상해야 할 때 저급한 어휘를 쓰고, 가벼운 대화에 고귀한 웅변을 사용했다. _139쪽⧫︎
︎︎︎
⧫︎
︎︎︎시인으로서 나는 지금까지 시종일관 영어를 권력 투쟁을 위한 무기로 취급해왔고, 나보다 더 힘센 자를 상대로 그 무기를 휘둘렀다. 그래서 영어로 애정 표현을 하는 데에 서투르다. _140쪽
⧫︎
︎︎︎나는 명미 킴이 가르치는 시 과목에 등록했다. ⋯ 교수는 어떻게 해서 시형(poetic form)이라는 회로가 우리가 말하는 것보다는 우리가 말하지 않는 것에 의해 충전되는지 논했다. 시라는 것은 완벽하게 형성된 구절보다는 더듬거림, 주저함을 잡아내는 그물이라고 했다. 침묵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자체가 하나의 심문이라고 했다. ⋯
명미 킴은 백인 시인의 말투를 닮을 필요도 없고 백인 청중이 알아듣기 쉽도록 내 체험을 “통역할” 필요도 없다고 내게 말해준 최초의 시인이었다. ⋯ 판독하기 어렵게 쓰는 것은 하나의 정치적 행동이었다. _190쪽
⧫︎
︎︎︎친구이자 시인인 유진 오스타셰브스키는 “영어를 한참 두드리다 보면 다른 언어로 통하는 문으로 변한다”라고 했다. 바로 그 점을 명미 킴이 내게 최초로 가르쳐주었다. 내가 눌변으로 여기는 부분 — 내가 이중언어 사용자라는 점, 어렸을 때 영어 때문에 고생한 점 — 을 역이용해 영어를 두드리고, 그것을 나의 갈등하는 의식에 가장 근접한 나만의 어휘소 목록 속으로 녹아들게 하라는 가르침이었다. _191쪽
⧫︎
︎︎︎헬렌이 눈물을 글썽여가며 강의 시간에 쓰기에도 지나치게 지적으로 다가오는 온갖 어휘를 동원해 내 시를 논했는데 걔가 그렇게 말하니까 왠지 진정성 넘치고 심오하게 들렸다. 헬렌은 그토록 감동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내가 시에서 뭔가 매우 핵심적인 것을 포착했다고 했다. 영혼을 포착했다고 했다. 시 속에서 내가 춤을 춘다고 했다. ⋯
나는 행복했다. 안도감이 밀려왔다. 누군가를 감동시키는 것이, 헬렌을 감동시키는 것이, 바로 글을 쓰는 의의라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진정한 존재가 되었다. 우리는 진정했다. _197쪽
『마이너 필링스』 ,두 번 세 번 읽기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