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언제나 조금 뒤늦게 와요.”
정지혜 영화평론가와 🌱죽순 미팅[을 빙자한] 수다
오랜만에 봬요. 시간이 정말 빠르네요. 저희가 『이후에 오는 글』(가제) 계약을 한 지도 근 2년이 되어가요.
난감하네요. 곧 크리스마스란 생각에 후달려요.
글빚을 잊은 적은 없어요. 7월에 제주도로 작가 피정도 다녀왔답니다. 하루 한 편의 글을 쓸 정도로 성실하게 썼어요. 제주도로 갈 준비를 할 때만 해도 너무 각을 잡나, 괜히 소란 떠는 것 아닌가 했는데, 막상 가니 쭉쭉 써지더라고요.
글이 써지기 시작하면 편안함을 느껴요. 그 전까지는 불안하고 분주하고 걱정만 많은데 말예요. 그럼 쓰면 될 텐데, 진득하게 앉아서 쓰기만 하는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네요. 프리랜서 원고 노동자의 생활이 그래요.
영화 잡지 『씨네 21』에서 기자로 경력을 시작하셨고, 벌써 10년 넘게 프리랜서 영화평론가로 활동하고 계신데요, 평론가라고 글만 쓰시지 않죠. 관객과의 대화 진행도 맡으시고 영화제 심사도 하시고요. 오늘은 뭐 하다 오셨어요?
한국독립영화협회가 주관하는 「2024 독립영화 쇼케이스 기획전」(2024.8.15.-17,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 KOFA 2관) 행사를 준비하다가 왔어요. 홍지영 감독의 「이 파도를 이 물결을 돌려줄게」란 영화 GV 진행을 맡았거든요. 이 영화 비평문도 써야 하고요.
이 영화에 대해 조금만 더 들려주세요.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집 『공통 언어를 향한 꿈』(허현숙 옮김, 민음사, 2020)에 수록된 시 「분열」에서 모티프를 얻은 영화예요. 가시적이지 않은 존재를 어떻게 가시화할 것인지를 다룹니다. 물결, 파도, 자연의 움직임, 출렁임, 일렁임이 이미지로도 잘 구현된 영화인데, 마침 제가 탐구 중인 주제와 맞물려 있어서 주의 깊게, 그리고 재미있게 작업 중이에요.
🌱 아, 중간 점검 때 주셨던 원고에서도 몸-물-영화의 고리에 대해서 언급하셨죠.
맞아요. 몸-물-영화, 이 세 가지가, 무엇이 먼저랄 것 없이 연결된 채 저의 머릿속을 헤엄치고 있어요.
영화 일을 하면서 남이 몸 쓰는 모습을 스크린을 통해 쉼 없이 봐 왔어요. 배우가 연기를 할 때 보여주는 움직임에 관심이 가더라고요. 그래서 안무가가 가르치는 움직임 워크숍에도 종종 참여했어요. 또 다리 통증으로 수술을 받고 꽤 긴 회복 기간을 거치면서 몸뚱어리가 참 재밌는 녀석이구나 싶더라고요. 마음처럼 움직여지지도 않고, 의지가 있다고 아픈 몸이 낫지도 않죠. 사실 영화가 거대한 몸체란 생각도 들어요. 실제로 육체가 꿈틀대기도 하고, 감정이 흐르기도 하죠.
🌱 아니 근데 ‘물’은요? 몸과 영화는 얼추 연결이 되는데, 물은 쉽지 않은데요.
저도 몸-물-영화를 엮어 나가면서 스스로에게 질문한 적 있어요. 허무맹랑한 질문이 아닐까? 터무니없지 않나? 그런데 두 가지 사건이 연결고리를 만들어주었어요.
어느 날, 평론가 선배가 이런 질문을 하더라고요. “넌 영화에 뭐가 나오면 좋아?” 대답을 망설이지 않았어요. 물이 나오면 좋았거든요. 물의 부력, 소리가 차단되는 고요, 등장인물의 거친 마음 상태를 보여주는 파도, 끝 모를 심연을 상징하는 물의 깊이, 이런 장면에서 저는 동요됐고 흔들렸어요. 물이구나, 내가 영화를 볼 때 물을 보는구나, 각인이 되었어요.
다른 하나는 『대양의 느낌』(에리카 발솜 지음, 손효정 옮김, 현실문화, 2024)이라는 책이에요. 저와 비슷하게 영화에서 물의 감각을 읽어내는 이가 있다니 반갑더라고요. 그리고 비평가가 구체적인 자기 질문을 갖고 영화들을 읽어내고, 자기만의 비평 지도를 그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재확인했어요. 비록 지면이 주어지지 않아서 마음껏 드러내진 못하지만요.
🌱 그래서 책을 쓰시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지면 창출 차원인 거죠. 웹진이나 뉴스레터를 운영해보시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아니, 그 전에 책을 마무리하시면 좋겠습니다만.
하하하. 그런데 어쩌죠. 제가 얼마 전에 일을 벌였어요. 오랫동안 지면을 기다리면서 살다 보니 조금씩 답답해지더라고요. 그래서 플로모션(flowmotion)이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했어요. 정해진 형식이 없고, 홍보라는 굴레도 없는, 영화평론가 정지혜가 읽고 보고 느낀 영화 이야기를 하는 자리예요. 물론 저만 주절주절 말하진 않을 거고요, 참석자들 사이사이 이야기가 흐르도록 하려 해요.
🌱 인스타그램 @hwasile153 에서 런칭을 알린 프로젝트가 이거군요. 영화 행사들이 사실 많잖아요. 그 와중에, 플로모션이 지향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영화가 끝난 후 20-30분 동안 진행하는 관객과의 대화는 늘 시간이 부족하고, 짧은 시간 안에 영화의 거개를 다루면서 그 내용이 관객들에게 선명하게 전달되어야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얼마간 예상 가능한 이야기를 하게 돼요. 감독에겐 캐스팅 과정을 묻고, 배우에겐 기억에 남는 일화를 질문하는 식으로요.
플로모션에서는 좁고 깊게 가보려고 해요. 좁고 깊은 길을 내는 것은 저이고, 때로는 아주 디테일한 것을 짚어보고 싶어요. 예를 들면, 영화 장면 하나를 두고 3시간 내내 이야기를 하는 거죠. 왜 이 장면을 이런 방식으로 촬영해야 했는지, 관객들도 그 연출의 효과를 이해했다고 생각하는지, 이 장면이 영화에서 어떤 역할인지, 배우는 어떤 분석을 했고 무엇을 염두에 두고 연기했는지 등이요.
🌱 그럼 플로모션은 영화인들을 위한 자리인가요?
꼭 그렇지는 않아요. 좁고 깊은 것이 ‘전문가 과정’처럼 여겨지는 것은 원하진 않아요. 오히려 ‘덕질’을 한다고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벙벙한 질문들, 느슨한 질문들은 재미가 없잖아요. 플로모션 안에서, 플로모션만의 질문들을 발견해갈 거예요.
🌱 첫 에피소드가 공개됐죠? 저도 신청했어요. 무척 기대됩니다.
며칠 전부터 모객을 시작했는데요, 너무 긴장돼요. 얼마나 와주실지, 어떤 분들이 오실지 모르니까요. 첫 번째 에피소드는 “흐르다 영화-몸-물의 그물망”을 주제로 제가 먼저 이야기를 이끌고, 2부에서는 옥자연 배우님과 ‘배우의 몸-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거예요. 8월 17일 토요일 오후 4시, 서울 합정역 근처의 ‘언제라도 여행’에서 진행하니,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에피소드 2와 3으로 풀어보고 싶은 주제도 어느 정도 구상을 했어요. “흐르다 영화-몸-물의 그물망”의 주제를 계속 이어가볼까 해요. 좁고 깊게, 그리고 길게 가보려고요. 어떤 호기심과 궁금증을 휘발시키지 말고 붙잡고 나가면 좋겠어요. 책을 함께 읽거나 작은 상영회를 여는 등의 다채로운 기획을 해보려고 합니다.
🌱 플로모션을 응원하는 것과 별개로, 작가님, 원고 마감은 언제 하실 건가요? 네? 언제 하실 거냐구요!
플로모션 에피소드 1을 성황리에 끝내고, 바로 제주도로 내려가든지 해야겠는데요. 같이 가실래요?🙂
🌱 책 독촉하러 왔더니, 플로모션 이야기만 잔뜩 하시고 말이죠. 우리 책 『이후에 오는 글』(가제)도 말씀해주세요.
아직 가제이긴 하지만 ‘이후에 오는 글’이란 제목에서부터 시작해볼까요. 음, 글은 언제나 조금 뒤늦게 와요. 영화 평론은 그야말로 영화를 본 후에 오죠. 그렇게 영화 후에 온 저의 글들 가운데에서 근래의 것들을 추려서 묶어보려고 해요.
그런데 조금 독특하게, 이 글들 이후에 또 다른 글들이 오더라고요. 영화 평론이 영화에 기대어 있듯, 영화 평론에 기대어 에세이를 썼어요. 그것은 관객 또는 독자와 거리가 멀다고 여겨지는 영화 평론으로 들어가는 문의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거예요. 저와 독자는 이렇게 연결될 수 있을지 몰라요. 영화-비평-에세이-비평-영화-에세이... 제가 영화를 보고 비평을 썼고 비평 이후에 에세이를 붙여서 책을 내요. 그러면 미래의 독자분들은 비교적 접근하기 편안한 저의 에세이를 통해 영화 비평으로 진입하고 결국 그 영화를 찾아서 보게 될지도 몰라요. 그런 후 자기만의 에세이를 쓸 수 있을 거고요. 저는 이 루프를 만들고 싶어요. 플로모션도, 『이후에 오는 글』(가제)도 이런 루프의 시작점이라는 점은 똑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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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다고 하시면 듣는 편집자가 서운합니다만, 편집자의 미덕은 인내와 기다림, 그리고 응원에 있으므로 서운함은 감춰봅니다. 온 시리즈 책날개의 ‘앞으로 나올 책’ 목록에 매번 오르는 『이후에 오는 글』(가제)이 어서 시리즈 연번을 달았으면 합니다. 아무래도 9번이 될 것 같긴 한데요, 10번은 안 됩니다, 작가님. 두 자릿수까지 가진 말자구요. 플로모션에서 북토크하는 날이 얼른 오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