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를 밀어붙이자, 자기이론이 될 때까지
🌱죽순
‘나’를 주어로 삼는 글이 넘칩니다. 흔한 진단입니다. 말을 조금 바꿔보겠습니다. ‘나’를 주어로 삼는 글은 넘쳐야 합니다. ‘나’ 안에 고여 있지 말고, ‘나’ 밖으로요.
잠깐 눈을 돌려서, 앳 시리즈의 뒤쪽 책날개를 한번 펼쳐볼까요. 앳 시리즈에 대한 편집자 나름의 설명이 적혀 있죠.
앳 시리즈는, 정체성 탐구의 복판을 관통하는 질문 '이 세계에서 내 위치는 어디일까'에 답해가는 작업이다. 또한 개인의 몸과 감정을 통해 지배 구조를 재인식하고 비평하는 '자기이론'적 시도이다.
앳 시리즈의 at이라는 이름은 다음의 맥락에서 탄생했습니다.
✔︎ 에이드리언 리치의 위치의 정치학 → 장소 및 위치를 나타내는 전치사로서 at
✔︎ 매기 넬슨이 폭발시킨 자기이론적 실천 → AutoTheory의 머리글자 A와 T의 조합
앳 시리즈는 탄생부터 '자기이론'에 빚을 지고, 아니 기대어 있고, 여기에서 ‘자기’는 세계 속의 자기, 관계 속의 자기입니다. 『자기이론』은 “단수가 복수로 이어지는 관문”(420쪽)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 회고록, 에세이, 퍼포먼스, 비디오 아트 등에 관심을 두고 그것들의 상호주관성, 상호텍스트성을 꼼꼼히 들여다봅니다.
매기 넬슨의 『아르고호의 선원들』(이예원 옮김, 플레이타임, 2024)은 물론이고, 난잡과 난해를 오가며 (특히 미국 바깥의) 독자들에겐 혼돈을 안겨주는 텍스트 크리스 크라우스의 『아이 러브 딕』(박아람 옮김, 책읽는수요일, 2019, 절판)에 대한 분석은 정말이지 탁월합니다.
『아르고호의 선원들』의 가장자리에는 넬슨이 인용한 이론가들의 이름이 덜렁 적혀 있고, 그의 파트너 해리 도지의 이름 또한 ‘인용’과 ‘출처’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본문과 나란한 여백을 이런 식으로 채운 이유, 궁금하지 않으셨나요?
“책을 읽으면서 여백에 표식을 남기는 실천은 종종 책을 펼치기 쉽도록 책등을 부러뜨리는 식으로 더 깊은 층위에서 일어나는 텍스트에 대한 가담을 보여준다. 표식이 생긴 가장자리는 책에 대한 물리적 참여를 드러낸다. 탐색 중인 생각과 관련된 중요한 구절 옆에 예술가나 작가는 화살표를 그리거나 메모를 추가한다. 마지널리아(marginalia)는 작가가 읽기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정교하게 만드는 수단, 혹은 작가가 미래에 다시 돌아가서 시작하고 싶어 할 중요한 구절을 확인하는 방식이다.” (227쪽)
“자기이론은 가장자리와 흥미로운 관계를 맺고 있으며, 자기이론적으로 작업하는 작가와 예술가는 종종 개념적 방식으로 가장자리에 글쓰기, 주석 달기, 끄적거리기와 같은 장치를 확장한다.” (227쪽)
물론 단순히 이런 장치를 사용(또는 차용)하는 것만으로 '자기이론적 실천'이 될 수는 없습니다. 글 안에서만이 아니라 삶에서, 생애에서, 자신의 인식을 바꾸고 어지럽혔던 이론들과 사람들을 녹여낸 실천이 자기이론에 속할 거라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자기이론은 어떻게 쓰일지 궁금합니다.
[책 속에서]
자기이론은 개인적인 것과 개념적인 것, 이론적인 것과 자서전적인 것, 창조적인 것과 비판적인 것을 학제적이고 페미니스트적인 역사들과 조응하는 방식으로 통합하는 일련의 작업 양태들을 시사한다. (23쪽)
자기이론적인 작업은 이론과 철학 사이에서, 경험적인 것과 신체화된 것 사이에서 움직인다. 무엇이 이론을 구성하는지, 그리고 누가 이론가를 자처하는지를 묻는 질문은 분명 교차성 페미니즘의 질문이고, 이러한 질문은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반식민적 렌즈를 사용해 접근했을 때 보다 복잡해진다. (30쪽)
자기이론은 “ 자서전과 이론적 성찰을 결합하고 억압과 저항의 역사들 안에 자기 자신을 편입시키길 고집하는 태도를 받아들인다”. (40쪽)
“자기이론 쓰기는 지식을 발전시키기 위해 신체 경험을 이용하는 방식이다." (43쪽)
자기이론은 자기에서 출현한 이론일 수는 있어도 자기에 대한 이론은 아니다. 자기와 정치이론, 언어학, 후기구조주의, 정동 이론, 퍼포먼스 이론, 미학, 젠더 등의 이론 사이를 오가는 자기이론가는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으로서의 직접적인 경험을 이론적 논증과 테제를 개발하고 연마하기 위한 토대로 사용한다. 자기이론은 이론과 철학의 담론들에 개입하는 페미니즘의 장소일 뿐 아니라 작가나 예술가의 삶의 소재들에 참여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실체화된 경험은 미학적, 사회적, 문화적, 도덕적 정치적 쟁점들을 통한 사유를 이끄는 또 다른 텍스트나 틀, 촉매제가 될 수 있다. (51쪽)
자기이론은 가부장적이고 식민지적인 맥락에 의해 억압되고 짓눌렸으며 지금도 그러한 상태에 있는 자기를 통해, 급진적인 자기-성찰, 신체화된 지식, 줄곧 이어져온 문학적 논픽션의 정치와 제휴한다. (55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