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텍스트를 통해 우리의 삶을 살아간다”
캐럴린 G. 하일브런의 『여성 쓰기』
🌱 죽순
캐럴린 G. 하일브런은 학문적 페미니즘의 대모로 불립니다. 1960년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컬럼비아 대학교 영문학과 종신 교수로 발탁된 그는 『여성 쓰기』(1988)라는 선구적인 연구서를 썼습니다.
재직한 30년 동안 하일브런은 페미니스트와 모더니즘을 전공한 젊은 여성 학자들을 채용하기 위해 분투했으며, 이는 그의 절친한 동료 낸시 K. 밀러가 한 말 “그는 영웅적인 수의 추천서를 썼습니다”에서도 생생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1992년 그는 컬럼비아 대학교의 성차별적 관행에 진저리를 치며 사임합니다. 남자 교수들이 “이건 우리 나무집 클럽이야. 여자들은 출입금지.ᐟ”라고 말하는 어린 애처럼 군다며 분개했다고 전해지죠. 여성들을 위한 지칠 줄 모르는 옹호자였던 하일브런은 “세상 속에서” 활동하기를 그치지 않았고, 퇴직 후에도 활발하게 강연 등을 이어갔습니다.
재밌는 사실은 그가 아만다 크로스라는 필명으로 추리소설을 썼고, 대중적인 성공을 거뒀다는 겁니다. 그가 탄생시킨 주인공은 (그 시절에는 매우 드물게도) 여성 탐정이었습니다. 늘씬하고 혈기왕성한 뉴욕의 문학 교수이면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잔악한 살인자들을 추적하는 내내 남성의 무능함을 한탄하고 비웃는 거침없는 캐릭터였죠. 여성 탐정 케이트 팬슬러는 새로운 여성의 서사를 발견하려고 애쓰던 하일브런 그 자신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대표작 『여성 쓰기』는 언어, 담론 그리고 그와 연관된 권력의 문제가 여성이 여성 스스로를 말하는 것마저 어떻게 재단하고 삭제하는지 들여다보며 여성의 새로운 이야기를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미국에서 초판이 출간된 지 근 40여 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유효한 이 주장은, 자전적 이야기와 교차적 정체성, 역사적 위치를 직조하는 ‘자기이론’과도 맞닿는 부분이 있습니다.
편집하는 내내 빨간펜보다 형광펜을 더 많이 들었던 것 같아요. 일단 밑줄을 긋고 볼 수밖에 없는 책이구나 싶을 정도로 많은 밑줄을 그었습니다. 표지에 그 문장들을 옮겼답니다.
*****
결혼에서 진정으로 혁명적인 것은 무엇일까? 예로부터 존재해온 남녀 한 쌍이 결합하는 방식을 고수하면서도 혁명이 가능할까?
권력은 무슨 이야기를 할지 정하는 힘이다. … 남성 권력은 특정한 이야기를 생각조차 못 하도록 만들어버렸다. 남성들이 여성들의 말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이유는 여성이 스스로 자신의 말을 폄하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여성들이 자신들의 대화를 남성들과의 대화보다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한, 여성의 말은 실제로 해롭지 않다.
여성들은 땍떅거리고 거슬린다고 폄하하는 것은 여성에게 가능한 어떠한 권리도 부정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불행히도 권력이란, 남성에게 허용된 삶과 여성에게 허용된 삶 간의 커다란 차이를 인식하는 순간, 그리고 남성의 권위와 지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폭력이 남성들에게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여성이 포기해버리는 것이다.
연인이 남편이 될 수 있다는 환상을 세심하게 조장하는 것은 그 환상의 덕을 보는 가부장제다.
아닌 게 아니라 여성들 간의 우정은 이야기된 적이 거의 없다. 여성들은 삶의 위기가 찾아올 때, 특히 결혼, 출산, 죽음, 질병, 고립과 같이 여성의 경험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가족의 위기 때 서로를 지원하고 지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여성들이 함께 일하고 살아가며 나누는 애정은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문명 기록자들에 의해 묵살당했다.
남성 친구들은 대개 서로 마주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나란히 서서 세상을 마주한다. 반면 여성들 간의 애정에 관한 기록에서 어떤 아름다움을 찾아내든, 이들의 애정 관계는 위로의 공동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
사실, 이 책의 백미는 차례입니다.
1. 결혼과 자살 외에 여성의 서사를 발굴하기
2. 모델도 모험도 없던 그녀는 오직 지성에 의지했다
3. 아버지를 죽이는 딸
4. 결혼을 다시 정의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럴 필요가 있을까?
5. 친밀함의 역사, 우정의 연대기
6. 여성의 공적 자아가 지닌 힘
7. 인기 없는 진취적인 늙은 여성
지금 서점에서 만나보세요.ᐟ
* 『여성 쓰기』는 『셰익스피어에게 누이가 있다면』(여성신문사, 2002)의 개정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