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책이었는데 엉뚱하게 애니메이션에 종착해 있을 때가 있어요. 책에 이끌려 새로운 차원을 넘나드는 경험은 지루해지질 않네요. 읽음-앎-느낌의 연쇄 작용을 알아챘을 때의 희열도 그렇고요. 각주 31호는 모르는 맛을 아는 맛으로, 몰랐던 소리를 아는 소리로 바꿔줄 트랜스지터 역할을 자처해볼까 합니다. 부디 성공적이길. 맛에의 충동 🌱 죽순 나무를 잘근잘근 씹는 비버를 실제로 보면 제일 먼저 어떤 반응이 나올까요?
저는 1번 이후 즉각 5번. 동물에 썩 애정이 없는데 감탄해야 하는 순간은 사회적으로 잘 습득한 팍팍한 인간의 반응이랄까요. 『나무의 맛』 저자는 물어보나 마나 4번입니다. 호숫가 근처를 산책하며 비버를 만날 수 있는 자연 속에 산다는 것도 놀랍지만, 비버가 먹는 걸 나도 먹어봐야겠다는 사고의 흐름을 갖춘 호기심 천국 유형이거든요. 이탈리아 폴렌조 소재의 미식과학대학 석사를 마친 음식 평론가 아르투르-시자르 에를라흐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비버의 잇자국이 남은 나무줄기를 찾아 조금(나무에 생채기를 남겨 미안해하면서) 잘라 먹어봅니다. 몇 종을 시식해본 그는 비버가 먹는 것과 둥지 재료로 쓰는 것이 나뉠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아요. 갈빛 수액이 끈적하고 쓴 나무가 있는가 하면, 씹을수록 시원하고 달달한 물이 나오는 나무가 있었거든요. 저자는 나무를 집 부엌에서 조리해 먹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꿈에 부풉니다. 그날을 그리며 나무의 풍미, 맛, 향을 진하게 머금은 음식들을 찾아 나서요. 나폴리로, 스위스로, 모데나로, 빈으로, 다르질링으로. <나무의 맛>은 그 견문의 기록입니다. 미술, 영화, 음악은 글로 쓰기 참 난감하죠. 형태와 색을, 쇼트의 길이와 빛의 쓰임을, 음색과 박자를 글로 표현하기란 얼마나 난망한가요. 맛도 그렇습니다. 글은 감관에서 나오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을지도요. 곧장 감각으로 들어가기 어려운 이런 글들은 그래서 이야기로 넘쳐납니다. 어떤 영화감독에게 영감을 준 어떤 영화나 클래식음악 작곡가들의 사생활은 작품을 감상하는 데 요긴한 재료가 되죠. 오크통에서 숙성한 와인에서 솔, 백향목, 백단목, 떡갈나무 향이 난다는 걸 아로마 휠을 보고 알면, 먹어본 적 없는 떡갈나무의 풍미를 건져 올릴 수 있게 되는 것처럼요. 저자가 만난 와인통 제조공, 런던의 홍차 상점 주인, 설탕단풍나무 수액 채취꾼…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한 번도 감각해본 적 없는 나무의 맛을 알아채기 위해 한 번은 꼭 거쳐야 하는 관문 같아요. 차원이 다른 나무 이야기, 아니 맛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10월 25일 출간 예정🪵🍴 기다리다 안 나와서 우리가 만들었어요 🔊 모베 누구나 좋아하는 바흐 음악 하나쯤은 있을 겁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과 무반주 첼로모음곡, 샤콘느 등은 굳이 찾아 듣지 않아도 광고, 영화, 드라마 등에서 숱하게 듣게 됩니다. 인벤션과 파르티타, 영국모음곡, 평균율 곡집, 음악의 헌정, 푸가의 기법, 바이올린 협주곡,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마태수난곡, 요한수난곡, B단조 미사곡 등도 애호가의 콜렉션이나 플레이리스트에 빠지지 않는 곡들입니다. 바흐는 많은 곡을 썼고, (다른 작곡가와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곡들이 지금도 연주됩니다. 그런데 아직도 절반이 더 남았습니다. 바로 200곡이 넘는 칸타타입니다. 바흐는 뮐하우젠, 바이마르, 라이프치히 등에서 매일 교회로 출근해 그 주에 연주할 칸타타를 서둘러 작곡해야 했던 직장 노동자였고, 칸타타는 바흐 음악의 핵심 중 핵심입니다. 박찬욱의 「박쥐」에 내내 흐르는 BWV82의 선율처럼 귀에 익은 곡들도 꽤 많습니다. 그러나 칸타타는 쉽게 즐기기에는 허들이 높은 편입니다. 무엇보다 독일어 가사가 음악에 빠져드는 데 방해를 합니다. 성경 구절과 당대 시인들의 시구에서 따온 빼어난 문장을 모른 척하고 칸타타를 듣기란 불가능합니다. 보통 CD 부클릿에 영어 번역 가사가 딸려 있지만, 글자도 작고 독일어를 들으면서 영어 번역을 따라가다 보면 놓치거나 잠들기 일쑤입니다. 애플뮤직이나 스포티파이라면 이마저도 불가능하고요. 칸타타 모두를 번역해 한 권으로 엮은 책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했습니다. 그러다 기다리느니 우리가 하자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빼어난 독일어 번역가이신 이기숙 선생님께서 가사 번역을, 바흐의 도시 라이프치히에서 바흐를 전공하신 나주리 동덕여대 교수님께서 해제를 맡아 주셨습니다. 번역 대본으로는 가디너의 바흐 칸타타 전집에 실린 텍스트와 최고의 칸타타 해설서로 알려진 뒤러의 Die Kantaten 을 삼았고, 교회력이 시작하는 순서대로 엮어 매주 몇 곡씩 1년에 걸쳐 바흐 칸타타 전곡을 다 들을 수 있도록 꾸렸습니다. 지금 한창 편집과 디자인 작업 중이에요. 11월 말에 손에 쥘 수 있을 듯합니다. 12월 중순에는 음악을 곁들인 나주리 교수님의 강연이 있을 예정이고, 내년 1년 동안 한 달에 한 번 칸타타를 함께 듣는 자리도 준비하고 있습니다(특별 게스트도 섭외 중). 뉴스레터에서 계속 소식 전할게요. ❝ 갖고 있는 책 중에 제일 비싼 책 #2 ❞ Tree of Codes (by 조너선 사프란 포어) 🌱 죽순 Tree of Codes 는 『책이었고 책이며 책이 될 무엇에 관한, 책』에 자료 사진으로 넣기 위해 중고로 구매했습니다. 어렴풋한 기억 속에선 돈 10만 원짜리였는데 아마존 구매 내역을 확인해보니 현재 환율로 21만 원이더라고요. 편집 자료인데 회사가 지원해줬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께 말씀드리자면, 저는 이 책을 살 합리적인 건수가 생겨 너무나 기뻤었습니다.😆
Tree of Codes 는 조너선 사프란 포어가 썼다고도 할 수 있고 오렸다고도 할 수 있는 묘한 책입니다. 포어가 한결같이 애정을 표해온 브루노 슐츠의 「악어 거리」(The Street of Crocodiles)의 단어와 문장을 도려내고 남겨 자기 작품으로 둔갑시킨 작품이거든요. 『배너티 페어』와의 인터뷰에서 포어는 “뭔가를 수동적으로 사랑할 수도 있고, 활동적으로 사랑할 수도 있는데, 「악어 거리」로는 뭔가를 해야겠다는 충동을 느꼈다”고 밝혔습니다.
속을 보면 대체 어떻게 제작했을지 감도 안 옵니다. 다이컷 기법으로 본문 종이를 뚫는 공정은 어찌어찌 그림이 그려지는데, 제본이 막막하네요. 각기 다르게 난도질된 종이를 제본기에 돌렸을리는 만무하고, 한 장, 한 장, 총 139장(구멍을 낼 거라 본문은 단면 인쇄)을 손으로 차곡차곡 모아서 한 권, 한 권 제본했을 겁니다. “조각”에 가까운 이 작업을 런던의 출판사 비주얼 에디션스와 네덜란드의 다이컷 전문 업체, 벨기에의 수작업 마감 업체(hand-finisher)가 해냅니다. ▶ Tree of Codes 메이킹 영상
비주얼 에디션스는 실험적인 책을 만드는 출판사입니다. 요즘은 구글과 플레이 북을 만들더라고요. 전자책과는 달라요. 텍스트를 영상으로 읽는다는 표현이 맞을 거예요. 백문이불여일견, 궁금하신 분은 여기를 클릭하세요. 이 형식이 아주아주 새로운 건 아니에요. 이미 영상+텍스트 조합으로 구현돼 앱으로 출시된 책들이 있거든요. 글쎄요, 책이라는 이름을 어디까지 붙일 수 있을지 알쏭달쏭해지네요. 🎥 퀘이 형제의 애니메이션 「악어 거리」도 브루노 슐츠의 「악어 거리」를 모티프로 합니다.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와 전위적인 음악이 낯설고 신선해요. 여기서 감상할 수 있어요. 우리끼리 몰래 즐겨요. ❝ 시고 뜨거운 국물맛, 어떠세요?❞ 🦻 팔랑 우리 동네에 새 식당이 생겼어요.
완전히 '새'(new)라고 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어요. 몇 개월 전부터 마포 서교동 일대에 배달 앱에서는 (리뷰들을 보건대) 제법 성황이었으니까요. 백신 접종 전 외출을 가급적 자제하던 시기에 마티 식구들도 배달 서비스로 맛을 본 이 식당이, 일하다가 등을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면(마티 편집부는 8층) 영업을 시작했는지 아직 아닌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바로 지척에 '홀을 겸비한 꽤 규모 있는 자리'에 새로이 오픈을 했답니다. 제목은, "운.남.덥.밥." 중식당에 으레 등장하는 그 빠알간 코팅지가 유리문에 붙고 나서도 한참 식당 문이 열리지 않았는데, 2주 전 금요일 드디어 전 식구들이 달려가볼 수 있었습니다.
중국 운남성의 본토 요리를 내놓으신다며 아직 정리되지 않은 메뉴판을 보여주셨는데... 흠, 역시 첫 주문은 난감해서 사장님께 여러 차례 설명을 들어야 했지요. 이쯤에서 떠오르는 영상이 있으신 분들, 손들어 보세요~! 🙃 그쵸? 그 영상, 그 유튜버. 따왕의 누나. 요사이 중국을 지나치게 미화하느라 성토가 잦기도 했지만 처음 그 영상들을 보았을 땐 인상적이라는 소감을 넘어 약간 기이하다고 느껴질 정도였죠. 특히 운남성의 기후. 세상의 모든 채소와 과일들이 열리는데다 거의 모든 식재료를 실온에서 발효시키고 삭혀도 썩지 않는다는 점. 일년 내내 지나치게 덮지도 지나치게 춥지도 않으면서 사방이 대체로 초록인데 가끔은 눈까지 내리는 듯한 날씨에, 지구에 저런 곳이 있구나 싶었지요. 아무튼, 제가 그 영상을 볼 때 가장 상상하기 어려운 미각은 바로 '시고 뜨거운 국물 맛'이었어요. 라임과 다양한 후추, 팔각, 레몬그라스, 민트 등 강한 향신채들이 넉넉하게 쓰이고 거기에 강력하고 화려한 웍의 불꽃쇼, 그 위에 더해지는 뜨거운 국물과 맵지 않은 빨간 기름.
맵지 않은 빨간 기름이라니, 신기할 따름이죠. 마티 식구들이 2주 동안 여섯 번 정도 방문했는데, 메뉴판은 여전히 낯설기만 합니다. 요리의 분량과 산미, 풍미, 맵기 정도 등에 관해서는 사장님께 상담 후 선택하시길 추천합니다. 🍈 🥢 사진은 수요일 3인 점심으로 선택한 마라탕과 가지육슬볶음+공기밥 책 좋아하는 친구가 떠올랐다면? |
편집진이 띄우는 책 이야기